#24 코비 브라이언트 (Kobe Bean Bryant) - 가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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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8/23/1978 필라델피아, 펜실베니아
키: 6-6 (198cm)
몸무게: 205 lbs.(98kg)
나이: 30
학력: 로워메리언 고등학교
포지션: 가드
드래프트: 1996년 1라운드 (13번 픽) 샬럿 호네츠
주요수상: 2008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 ... 올스타 9회 선정 ... NBA 정규시즌 MVP (2008) ... NBA 득점왕 2회 (2006~2007) |
● 통산 성적
시즌 |
팀 |
경기 |
시간 |
FG% |
3P% |
FT% |
REB |
AST |
STL |
BLK |
TO |
PF |
PTS |
96/97 |
LAL |
71 |
15.5 |
.417 |
.375 |
.819 |
1.9 |
1.3 |
0.7 |
0.3 |
1.6 |
1.4 |
7.6 |
97/98 |
LAL |
79 |
26.0 |
.428 |
.341 |
.794 |
3.1 |
2.5 |
0.9 |
0.5 |
2.0 |
2.3 |
15.4 |
98/99 |
LAL |
50 |
37.9 |
.465 |
.267 |
.839 |
5.3 |
3.8 |
1.4 |
1.0 |
3.1 |
3.1 |
19.9 |
99/00 |
LAL |
66 |
38.2 |
.468 |
.319 |
.821 |
6.3 |
4.9 |
1.6 |
0.9 |
2.8 |
3.3 |
22.5 |
00/01 |
LAL |
68 |
40.9 |
.464 |
.305 |
.853 |
5.8 |
5.0 |
1.7 |
0.6 |
3.2 |
3.3 |
28.5 |
01/02 |
LAL |
80 |
38.3 |
.469 |
.250 |
.829 |
5.5 |
5.5 |
1.5 |
0.4 |
2.8 |
2.9 |
25.2 |
02/03 |
LAL |
82 |
41.5 |
.451 |
.383 |
.843 |
6.9 |
5.9 |
2.2 |
0.8 |
3.5 |
2.7 |
30.0 |
03/04 |
LAL |
65 |
37.6 |
.438 |
.327 |
.852 |
5.5 |
5.1 |
1.7 |
0.4 |
2.6 |
2.7 |
24.0 |
04/05 |
LAL |
66 |
40.7 |
.433 |
.339 |
.816 |
5.9 |
6.0 |
1.3 |
0.8 |
4.1 |
2.6 |
27.6 |
05/06 |
LAL |
80 |
40.9 |
.450 |
.347 |
.850 |
5.3 |
4.5 |
1.8 |
0.4 |
3.1 |
2.9 |
35.4 |
06/07 |
LAL |
77 |
40.8 |
.463 |
.344 |
.868 |
5.7 |
5.4 |
1.4 |
0.5 |
3.3 |
2.7 |
31.6 |
07/08 |
LAL |
82 |
38.9 |
.459 |
.361 |
.840 |
6.3 |
5.4 |
1.8 |
0.5 |
3.1 |
2.8 |
28.3 |
08/09 |
LAL |
- |
- |
- |
- |
- |
- |
- |
- |
- |
- |
- |
- |
총합 |
- |
866 |
36.5 |
.453 |
.340 |
.839 |
5.3 |
3.6 |
1.5 |
0.6 |
2.9 |
2.7 |
25.0 |
● Did you know?
고교시절 기록한 2883득점은 남동부 펜실베니아 학교 역사상 최고기록으로 남았다. 이는 전설적인 득점기계 윌트 체임벌린의 종전 기록인 2359점을 뛰어 넘은 것이다...부친 조는 필라델피아 76ers와 샌디에고 클리퍼스, 휴스턴 로케츠에서 8시즌 간 평균 8.7점을 기록했다...샤리아와 샤야라는 두 명의 누나가 있다...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스타워즈 시리즈다.
● 코비 브라이언트 전기 (Biograph)
전 NBA 선수이자 LA 스팍스 감독을 지낸 조 '젤리빈' 브라이언트의 아들. 코비의 이름은 그의 부모가 레스토랑의 스테이크 메뉴를 보고 지은 것이다. 코비는 NBA 최고의 센터 샤킬 오닐과 2000~2002년까지 3연속 우승을 일궈냈다. 2004시즌 결승전 패배후 오닐은 팀을 떠났고 코비는 레이커스 프랜차이즈의 초석이 되었다.
2006-2007 두 시즌 동안 득점왕에 올랐으며 2006년에는 NBA 역사상 단일경기 득점기록에서 2위에 해당하는 81점을 넣어 세상을 놀래켰다. 2008년에는 생애 첫 MVP를 수상하고 팀을 서부지구 1위로 이끌며 파이널 진출을 일궈냈다. 같은 해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첫 국가대표로 출전하며 금메달에 공헌하였다.
2003년에는 콜로라도 주 에드워즈의 호텔에서 종업원 성폭행 소송으로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코비는 성폭행이 아닌 합의하에 가진 관계라 주장했고 2004년 코비의 증언을 증명할 증거가 발견되며 결국 고소인은 소송을 취하했다.
유년시절_코비는 1978년 아버지 조 브라이언트과 팸 브라이언트 사이에서 필라델피아 펜실베니아에서 태어났다. 코비가 6살때 조는 NBA를 떠났고 가족 모두가 이탈리아로 이민을 가게 된다. 조는 이탈리아 리그에서 선수생활을 재개했고 코비는 이탈리아어를 빠르게 습득하며 유럽 생활에 적응했다.
축구강국 이탈리아 답게 코비도 축구의 매력에 빠져 직접 배우기도 했고 그가 좋아했던 첫번째 프로팀은 AC 밀란이었다. 코비는 만약 이탈리아를 떠나지 않았다면 프로축구 선수가 되도록 노력했을거라 말했을 정도로 축구를 좋아했다. 현재 그가 좋아하는 팀은 FC 바르셀로나다. 특히 전 FC 바르셀로나의 전 매니저 프랑크 라이카르트와 호나우딩요를 좋아했고 베이징 올림픽에서 메시의 열성팬임을 밝혔다.
1991년 미국으로 돌아온 코비는 영주권 획득기간 동안 필라델피아 근교의 로워 메리언 고교에서 놀라운 농구 경력의 첫 발을 내딛었다. 또한 SAT(미국 대학 진학 적성 검사)에서 1080점을 획득하며 장학금도 확보했다. 결국 코비는 듀크대학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NBA 직행열차를 타며 농구관계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NBA_코비는 1996년 NBA드래프트 1라운드에서 13번째로 샬럿 호네츠에 지명됐다. 코비는 레이커스가 아니면 뛰지 않겠다고 밝혔고 에이전트인 안 텔름 역시 이를 수렴하여 호네츠 행은 없을 것이라 못을 박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네츠는 코비를 지명했고 결국 LA 레이커스의 단장이었던 제리 웨스트는 주전 센터 블라디 디박과 코비의 트레이드를 단행하였다.
염원하던 레이커스 유니폼을 입게 된 코비는 첫시즌 에디 존스와 닉 밴 엑셀, 바이런 스캇등 쟁쟁한 선배들 그늘에 가려 벤치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시즌을 거듭할수록 출장시간은 조금씩 늘어났고 팬들은 하이-플라이어(High-Flyer)로서의 코비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1997 슬램덩크 콘테스트에서는 아이제이아 라이더의 비트윈더렉 덩크를 재현하며 우승을 차지했다.
데뷔시즌보다 더 많은 출장시간과 역할을 부여받은 2번째 시즌의 코비는 어느새 레이커스의 최고 식스맨으로 성장해 있었다. 덕분에 코비는 그의 능력을 코트에서 보다 더 발휘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었다. 올스타전에서는 팬투표를 통해 인기를 확인했고 서부지구 스타팅으로 선발되는 영예를 안았다. 코비는 뉴욕 브로드웨이의 팬들 앞에서 화려한 묘기를 선보이며 명실상부 범세계적인 수퍼스타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이듬해인 1998-99시즌에는 에디 존스와 닉 밴 엑셀이 트레이드 되며 염원하던 스타팅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플레이오프까지 승승장구 했지만 트윈타워를 앞세운 샌안토니오에 무기력하게 스윕을 당하며 결과는 그리 좋지 못했다.
절치부심한 레이커스는 1999-00시즌을 앞두고 코비의 든든한 멘토 필 잭슨 감독을 영입했다. 잭슨 감독의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력은 코비를 리그 최고의 슈팅가드 중 한명으로 성장시켰다. 코비는 올 NBA팀과 수비팀, 올스타에 선정되며 리그에서의 입지도 넓혔다.
특히 6회 우승의 노하우를 레이커스에 투영시켜 오닐과 코비의 시너지를 극대화하는데 성공시켰다. 이후 2001-02시즌까지 레이커스는 3연속 우승을 달성하며 화려한 명가의 부활을 알렸다.
코비 개인적으로 최고의 해를 보낸 2002-03시즌은 풍성한 기록들이 쏟아지며 그를 최고 슈팅가드 반열에 올려 놓았다. 주요 기록을 살펴보면 9경기 연속 40득점 달성과 2월 한 달동안 기록한 40.6점 6.9리바운드 5.9어시스트 2.2 스틸의 대활약이다. 개인성적은 올-NBA팀과 수비팀에서 동시 1st 팀으로 이어졌지만 아쉽게도 플레이오프에서 샌안토니오에 덜미를 잡혀 4연속 우승에는 실패하게 된다.
2003-04 시즌은 레이커스만큼 코비에게도 잊고 싶은 시즌으로 남았다. 베테랑 포워드 칼 말론과 게리 페이튼의 가세로 이른바 지구 방위대가 결성됐지만 파이널까지 진출한 레이커스는 동부 신흥강호 피스톤스에 의해 우승이 무산됐다. 코비는 기록에서 전년대비 하락이 다소 있었지만 정규시즌과 플레이오프를 통틀어 여전히 공격을 이끌었다. 하지만 파이널 전에서 35%의 저조한 필드골 성공률로 부진을 면치못했다.
이른바 '전당포'의 실패로 인한 후폭풍은 예상외로 거셌다. 팀의 기둥 샤킬 오닐은 마이애미로 떠났고 필 잭슨은 자서전을 통해 코비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등 코트 밖에서의 잡음은 그칠줄을 몰랐다. 엎친데 덥친격 신임감독으로 부임한 루디 톰자노비치는 건강상의 이유로 중도하차하여 선장 잃은 레이커스 호는 난파하고 만다. 10년만에 플레이오프에 탈락한 레이커스의 책임은 새로운 리더 코비에게 지워졌고 코비는 올 NBA 서드팀으로 탈락함과 동시에 수비팀에는 이름도 올리지 못하는 수모를 겪게 된다.
시련은 코비를 더 강하게 만들었다. 2005-06시즌 코비는 돌아온 잭슨 감독과 함께 역사적인 시즌을 보내게 된다. 1월 22일 토론토전에서 NBA 역사에 남을 한 경기 81점을 기록하는 등 시즌 내내 득점쇼를 펼치며 생애 첫 득점왕을 거머쥔다. 코비는 덕분에 무수한 득점기록을 양산해냈는데 1964년 체임벌린 이후 4경기 연속 45득점 이상을 올린 첫번째 선수가 된 것을 비롯 프랜차이즈 기록인 단일시즌 최다 40득점 경기기록(27회)등 역사책을 연일 갈아 썼다.
2006-07시즌은 코비가 다시 한번 태어난 해다. 데뷔 후 10년만에 백넘버를 교체한 것. 종전 8번에서 24번으로 바꾼 코비는 '하루는 24시간이며 공격제한 시간도 24초인 만큼 매 순간 열심히 하겠다'며 배경을 밝혔다. 코비 백넘버의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보자. 코비는 입단 당시 로워 매리언 고교시절에 쓰던 33번을 원했으니 압둘자바의 영구결번으로 포기해야 했다. 고심하던 코비는 당시 전미고교 유망주들이 참가하는 아디다스 ABCD캠프에서 쓰던 143번 넘버를 합친 8번을 택했다.
비록 숫자는 바뀌었지만 코비의 득점행진은 계속됐다. 3월 16일 포틀랜드 전에서 생애 2번째 기록인 65점을 기록한 코비는 팀의 7연패를 끊었고 4경기 연속 50득점 이상을 기록하며 윌트 체임벌린 다음으로 이 부문 2위에 올랐다. 코비는 2007시즌 져지 판매 집계에서 미국뿐 아니라 중국내에서도 1위를 차지 불미스러웠던 과거에서 벗어나 긍정적 이미지 변신에 성공했다는 평을 받았다.
코비는 파란만장한 두 시즌을 보냈지만 마음 한구석의 공허함을 떨칠 수 없었다. 개인적인 부와 명성은 충분히 쌓았지만 팀이 승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코비는 2007년 오프시즌에 제리 웨스트 단장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팀을 떠나겠다며 구단 프론트를 압박했지만 필 잭슨 감독과의 대화를 통해 트레이드 요청을 철회했고 극적으로 팀에 합류한다. 코비는 새끼손가락 부상으로 정상적인 슈팅이 힘든 상황이었지만 2008 시즌과 베이징 올림픽을 위해 한사코 수술을 고사했다.
지난 2년간 보여주었던 폭발적인 득점력은 다소 수그러들었으나 팀원들을 살리는 이타적인 모습으로 새롭게 변신하며 레이커스를 이끌었다. 특히 시즌 도중 트레이드로 영입한 파우 가솔이라는 천군만마를 얻으며 결국 염원하던 파이널 진출을 이루어낸다. 5월 6일에는 생애 첫 정규시즌 MVP를 수상하며 명실상부 리그 최고 선수로 자리매김 하였다. 디펜딩 챔피언 샌안토니오 스퍼스 마저 격파하며 승승장구한 레이커스와 코비는 파이널전에서 케빈 가넷과 레이 알렌이 새롭게 가세한 보스턴 셀틱스와 격돌하며 실로 오랜만에 라이벌전을 펼쳤지만 5경기 만에 고배를 들었다.
국가대표_2006년 미국 남자농구 대표팀에 합류한 코비는 2007년 베이징 올림픽 대륙별 예선전에서 대표팀의 10전 전승을 이끌며 금메달을 향해 일보 전진했다. 토너먼트 기간 동안 코비는 16.3점 2.2리바운드 3.1어시스트를 기록하며 고른 활약을 펼쳤다. 본선에 진출한 미국대표팀은 NBA 스타들을 위시하여 8년만에 금메달을 되찾았고 코비는 손가락 부상에도 불구하고 고비 때마다 해결사를 자처하며 팀에 공헌하였다. 코비는 본선에서 15.0점 2.8리바운드 2.1어시스트로 젊은 팀 동료들을 독려하며 성공적인 첫 대표팀 데뷔를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