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마이클 조던 믹스를 보면, 조던의 우아한 개인기 뿐 아니라 그에게 농락당한 후 고개를 떨구거나, 털썩 주저앉거나, 머리를 쥐어뜯곤 하는 상대팀 선수들의 모습 역시 감상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뉴욕 닉스의 유니폼과 함께 유독 자주 보이는 유니폼은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파란 옛 유니폼이다. 그들은 ‘The Shot'을 포함, 플레이오프에서 조던에게 두 번이나 위닝샷을 허용해야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1980~90년대의 클리블랜드는 많은 팬들에게 만년 약체 팀으로 기억되곤 한다. 하지만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까지의 클리블랜드는 매직 존슨이 ‘90년대를 이끌어갈 팀’이라 평할 만큼 남부럽지 않은 강팀 중 하나였고, 특히 플레이오프에서 조던의 시카고와 수많은 명승부를 펼치곤 했다.

1980년대의 그러한 발전을 이끈 선수는 브래드 도허티마크 프라이스였다. 뛰어난 실력만큼이나 진한 아쉬움을 남긴 이들이 클리블랜드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그때까지 형편없는 프랜차이즈였던 클리블랜드가 운명을 걸고 시도한 리빌딩 플랜 덕분이었다.


역사상 최고의 대박 드래프트

1970년 창단된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는 리그가 알아주는 약체 팀이었다. 오스틴 카, 네이트 서몬드 등의 스타 선수들이 거쳐 가기는 했지만 팀 성적은 별 볼일 없었다. 그나마 1975-76 시즌 센트럴 디비전 1위에 올랐지만 그것도 잠시, 1981년부터 1983년까지는 무려 4명의 감독과 23명의 선수가 들락날락하면서 도저히 팀이라 부를 수 없는 수준까지 망가져갔다. 1984-85 시즌에는 조지 칼 감독이 감독을 맡아 플레이오프에 오르기도 했지만 승률 50%의 벽은 높기만 했다. 결국 1985~86 시즌 29승에 그치며 리그 최하위 권으로 떨어진 클리블랜드는 그동안 팀 캐미스트리에서 문제를 보이던 로이 힌슨, 월드 B 프리 등을 내보내고, 여러 장의 드래프트 픽을 모아 대대적인 리빌딩 작업에 나섰다.

구단주인 군드 형제가 리빌딩을 위해 영입한 웨인 엠브리 제너럴 매니저는 그 해 드래프트에서 반드시 대박을 터뜨릴 것을 주문받고 드래프트 장으로 향했다.

그 해 드래프트 시장에 나온 주요 선수들 중에는 조던의 2미터 대 버전이라 불리던 렌 바이어스를 비롯, 그의 라이벌 제로드 워시번, 가능성 넘치는 수비형 센터 로이 타플리, 대학 최고 슈터 척 퍼슨과 델 커리, 나중에 한 게임 최다 어시스트 기록을 세우게 되는 스캇 스카일스 등 유망주들이 우글거렸고, 심지어 유럽 최고 센터인 아비다스 사보니스까지 참여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좋은 선수가 어찌나 넘쳐났던지 충분히 1라운드에 뽑힐 만한 선수들이 2라운드로 밀려날 정도였다. 데니스 로드맨과 제프 호너섹 등이 그 해 2라운더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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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클리블랜드는 1번 픽 외에도 1라운드 8번 , 2라운드 5번 등 상위 픽을 많이 가지고 있었고 댈러스가 선택할 2라운드 1번 픽 선수도 받게 되어 있었다. 엠브리는 고심 끝에 1번 픽으로 조던의 대학 후배이며 NCAA 최고의 센터였던 브래드 도허티를, 8번 픽으로는 마이애미대 오하이오 캠퍼스의 운동 능력 넘치는 가드 론 하퍼를 뽑은 후 2라운드 5번 픽으로는 리치몬드대의 성실한 스윙맨 조니 뉴먼을 뽑았다. 엠브리는 성공적인 드래프트를 했다고 생각했고, 댈러스가 2라운드 1번으로 지명한 조지아 공대 출신의 잘 생긴 포인트가드 마크 프라이스를 데리고 갔다.

그런데 엠브리의 선택은 그냥 성공적인 정도가 아니라, 거의 신들렸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가 선택한 도허티와 하퍼 사이에 있던 선수들 중 2번 렌 바이어스는 드래프트 직 후 마약 중독으로 숨졌고, 3번 제로드 워쉬번과 6번 윌리엄 배드포드, 7번 로이 타플리 역시 약물 남용으로 일찌감치 리그를 떠났던 것이다. 지금도 1986년 드래프트는 리그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드래프트로 남아있다.

이런 문제 많던 선수들을 모조리 피해 견실한 선수들만 뽑아 클리블랜드로 돌아온 엠브리는 신임 감독 레니 윌킨스에게 루키들을 넘겼다. 클리블랜드는 리빌딩을 시작한 팀이었기 때문에 루키들은 많은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윌킨스의 조련 하에 트레이닝캠프를 마친 루키들은 시즌이 시작되자 마음껏 실력을 뽐내기 시작했다. 도허티와 하퍼, 그리고 전년도에 입단했지만 부상으로 한 경기도 뛰지 못했던 존 윌리엄스는 스타팅으로 뛰며 맹활약했고, 도허티는 평균 득점 15.7점, 하퍼는 22.9점, 윌리엄스는 14.6점을 기록했다. 이들은 모두 올 루키 팀에 선정됐다. 한편 프라이스와 뉴먼은 식스맨으로 뛰며 실력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패싱 센터와 슈팅 포인트가드, 리그를 호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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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시즌, 마침내 도허티와 프라이스 콤비가 탄생했다. 클리블랜드의 스타팅 포인트가드 자리는 존 배글리가 팀을 떠나면서 공석이 됐고, 윌킨스 감독은 그 자리에 프라이스와 그 해 7번 픽으로 데려온 케빈 존슨 중 누구를 넣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결국 프라이스의 외곽 능력과 도허티와의 호흡을 눈여겨봤던 윌킨스는 프라이스를 선택했고, 케빈 존슨을 타이론 코빈, 마크 웨스트 및 드래프트 픽과 함께 피닉스로 보내고 초대 슬램덩크 챔피언 래리 낸스를 데려왔다.

스타팅으로 80경기를 뛴 프라이스는 평균 16점 6어시스트를 올리며 감독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고, 50.6%의 야투 성공률, 48.6%의 3점 슛 성공률 및 87.7%의 자유투 성공률로 170 클럽에 가입했다. 프라이스와 콤비를 이루게 된 도허티 역시 전년도보다 득점과 리바운드 기록을 향상시켰고, 센터로써 평균 4.2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올스타에 선정되기도 했다. 유망주 콤비의 탄생이었다.

결국 전년도보다 11승이 향상된 42승으로 센트럴 디비전 4위를 차지한 클리블랜드는 플레이오프에 진출, 그 해 MVP 조던이 이끄는 시카고와 맞붙었다. 클리블랜드는 프라이스와 도허티가 빼어난 활약을 보였지만, 느닷없이 폭발한 시카고 루키 피펜 때문에 2-3으로 패하고 말았다. 조던과의 긴 악연의 시작이었다.


1988-89 시즌, 도허티와 프라이스는 점점 더 많은 것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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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허티는 운동 능력이 뛰어난 선수는 아니었지만 다채로운 슛 기술과 부드러운 스텝, 그리고 역대 포워드 중 통산 블록 1위인 낸스의 도움으로 이를 극복했다. 또한 도허티가 포스트에서 빼주는 패스는 프라이스와 크레이그 엘로 등 뛰어난 외곽 슈터에게 연결되곤 했다.

프라이스는 슛의 교과서로 성장했다. 그는 코트 어디에서, 어떤 자세에서 패스를 받건 똑같은 타이밍과 똑같은 각도로 점프슛을 쏠 수 있는 선수였다. 자신보다 운동능력이 좋은 수비수를 따돌리고 그런 슛을 쏘기 위해서는 강한 다리 힘과 신체 밸런스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프라이스는 웨이트트레이닝을 통해 10kg 이상 근육을 키웠다. 또한 프라이스는 슛을 쏠 때 검지를 가장 부드럽게 사용하는 선수이기도 했다. 한편 운동능력의 부재를 극복하기 위해, 프라이스는 한발 빠른 판단력과 의외로 강했던 힘으로 공격자파울을 유도하거나 패스미스를 유도하는 기술을 익혀나갔다. 그는 리그에서 48분 환산 파울이 가장 적은 포인트가드 중 하나였다.

도허티와 프라이스는 나란히 올스타전에 출전했고, 프라이스는 All NBA 팀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들 듀오를 앞세운 클리블랜드는 37승 4패의 홈경기 성적을 포함한 시즌 57승으로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고 승률을 올리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1라운드에서 만난 팀은 작년 클리블랜드를 탈락시켰던 시카고였다. 클리블랜드는 무려 9명의 선수를 갈아치운 충격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시카고를 상대로 시리즈를 최종전까지 끌고 갔다. 클리블랜드 홈에서 맞이한 5차전. 클리블랜드는 종료 직전까지 1점차로 앞서고 있었지만, 조던이 엘로 위로 역사에 길이 남을 ‘The Shot'을 터뜨리며 또다시 클리블랜드 팬들의 가슴을 얼어붙게 했다.

1989~90시즌, 오픈 코트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이던 론 하퍼를 대니 페리와 바꾸는 실수를 저지른 데다 도허티가 부상으로 41경기를 빠진 클리블랜드는 전년도보다 15승이나 적은 42승으로 시즌을 마쳤다. 프라이스가 평균 19.6득점과 9.1어시스트로 고군분투했지만 곤두박질치는 팀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프라이스가 부상으로 시즌 대부분을 결장하면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Beat DA Bul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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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92 시즌, 마침내 도허티와 프라이스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도허티는 생애 최초로 평균 20득점-10리바운드를 달성했고, 프라이스는 무려 94.7%의 기록적인 자유투 성공률과 함께 조던으로부터 동부 최고의 포인트가드라는 극찬을 받으며 리그 최고의 공격형 포인트가드로 자리매김했다. 둘은 올스타와 All NBA 3rd 팀에 나란히 선정됐다. 수비의 보루로 여전한 활약을 보여준 낸스와 All Rookie 팀에 선정된 신인 테럴 브랜든의 활약이 더해지면서, 클리블랜드는 1988-89 시즌에 이어 두 번째로 57승을 기록했다. 이는 67승을 기록한 시카고에 이어 리그에서 두 번째로 좋은 기록이었고, 서부 컨퍼런스 1위인 포틀랜드와 같은 성적이었다.

3번 시드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클리블랜드는 1라운드에서 도허티가 40득점을 폭발시키는 등 대활약하며 뉴저지에 3-1 승리를 거두었고, 2차전에서는 보스턴 셀틱스를 맞아 래리 버드의 은퇴경기가 된 7차전을 승리하며 프랜차이즈 역사상 처음으로 컨퍼런스 파이널에 진출했다. 상대는 이제 이름만 들어도 지긋지긋한 디펜딩 챔피언 시카고였다.

클리블랜드 선수들은 각각 자신의 정규시즌 성적보다 더 뛰어난 성적을 올리며 선전했다. 4차전까지는 한 경기 씩 주고받으며 2-2의 균형을 이뤘지만, 조던을 앞세운 시카고는 5,6차전을 내리 승리하며 클리블랜드를 탈락시켜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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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93 시즌 도허티와 프라이스 콤비는 완벽에 가까운 호흡을 자랑했다. 도허티는 20.2득점 10.2리바운드 4.4어시스트를 기록했고, 프라이스는 조던과 함께 All NBA 1st 팀 가드에 선정됐다. 그들은 나란히 올스타전에 출전하여 프라이스가 3점 슛 대회에서 우승하기도 했다. 결국 클리블랜드는 시즌 54승을 거두며 다시 한 번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1라운드에서 뉴저지를 맞아 의외로 고전한 끝에 3-2로 2라운드에 진출한 클리블랜드는 숙적 시카고와 격돌하게 되었다. 그간의 경험을 통해 크레이그 엘로 만으로는 조던을 막을 수 없음을 통감한 클리블랜드는 조던을 전담 수비할 제럴드 윌킨스를 영입해 놓고 있었다. 도미니크 윌킨스의 동생인 제럴드는 형을 닮은 뛰어난 운동 능력을 앞세워 ‘조던 스타퍼‘를 자신했다.

클리블랜드는 윌킨스를 조던에게 붙였지만, 결과는 너무도 허망했다. 윌킨스의 장담을 듣고 그의 수비 모습을 담은 비디오를 집중 연구한 조던은 고비마다 슛을 성공시키며 ‘녀석은 날 막을 수 없어!’를 외쳐댔고, 클리블랜드는 조던을 한 명에게 맡기는 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지 온몸으로 증명하며 스윕당하고 말았다.


부상이 앗아간 꿈

1993-94 시즌, 조던이 은퇴하면서 도허티와 프라이스에게 한 번의 기회가 더 주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운명의 여신이 조던만 데려간 것은 아니었다.

1994년 2월 중순, 프랜차이즈 통산 최다득점 신기록을 세운 도허티는 그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등 통증의 원인을 알게 되었다. 검사 결과는 치명적인 수준의 척추 디스크. 즉시 수술이 필요하며 수술 후에는 더 이상 농구를 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은 도허티는, 다른 선수들이 한창 전성기를 맞을 28살에 은퇴 선언을 해야 했다.

도허티의 갑작스런 은퇴에 낸스까지 부상으로 은퇴한 클리블랜드는 더 이상 강팀이라 할 수 없었다. 시즌 47승을 거두며 그럭저럭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긴 했지만 프라이스 혼자서 팀을 승리로 이끌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결국 1라운드에서 시카고에게 스윕당하고 말았다.

홀로 남은 프라이스는 1994-95시즌 무릎 부상으로 48경기만 출장했고, 팀은 또다시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결국 클리블랜드 구단은 테럴 브랜든과 타이론 힐을 중심으로 팀을 리빌딩하기로 결정했고, 시즌 종료 후 프라이스를 골든스테이트로 트레이드했다.

이후 프라이스는 워싱턴을 거쳐 올랜도에서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가장 소프트했던 명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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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우승 경험도 없고 큰 상도 받은 적이 없지만, 도허티와 프라이스가 클리블랜드 구단에 남긴 족적은 작지 않다. 도허티는 팀 내 통산 리바운드 1위를 비롯하여 득점, 야투성공률 및 출장 시간 2위, 자유투 시도 및 성공 3위, 평균 득점 및 어시스트 5위, 통산 스틸 9위 등 거의 모든 카테고리에서 톱 10에 들었고, 프라이스는 어시스트와 스틸, 3점 슛 시도 및 성공 1위, 통산 득점 3위, 야투 및 자유투 성공 4위이며 통산 90.4%의 자유투 성공률은 리그 역사를 통틀어 최고다. 도허티가 1997년에, 프라이스가 1999년에 각각 영구 결번 처리된 것은 이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명예였다.

보통 포인트가드가 패스하고 센터가 득점하는 것이 농구의 기본이지만, 이들은 센터가 패스하고 포인트가드가 득점하는 색다른 방식의 농구를 할 줄 아는 콤비였다. 그들은 둘 다 운동능력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타고난 농구 센스로 이를 극복했고 깔끔한 농구를 했으며 부상으로 일찍 선수생활을 접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비록 리그를 압도할 만한 임팩트는 없었지만, 그들의 농구는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오늘날 클리블랜드는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할 필요가 없는 팀이다. 굳이 도허티와 프라이스를 기억하지 않더라도, 새 구장 퀵큰 론즈 아레나에서는 과거 그들을 그토록 괴롭혔던 등번호인 23번을 단 클리블랜드 저지가 팔리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천장에 걸려 클리블랜드의 경기를 지켜보고 있는 둘의 저지는, 한때 좋은 시절을 함께 했던 명콤비의 추억을 조용히 말해주고 있다.


에필로그

1999-2000 시즌, 창단 30주년을 맞은 클리블랜드 구단은 오하이오 주의 농구 전문 기자 32명에게 올타임 프랜차이즈 베스트 5의 선정을 의뢰했다.

32명이 한 표 씩을 던진 투표에서 도허티는 만장일치로, 프라이스는 31표를 얻어 베스트 5에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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