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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농구 선수권 사상 최고의 역전 드라마가 낳은 비운의 사나이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1. 29. 08:02


1986
년 세계 농구 선수권은 냉전시대의 산물인 올림픽 보이코트로 인해 연이어 무산됐던 구소련과 미국의 농구 맞대결을 볼 수 있었던 장이어서 당시에 매우 큰 관심을 끌었던 대회였습니다.

 

미국에서도 그 당시에 막 떠오르던 스포츠 전문 케이블 방송인 TNT가 테드 터너 사장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대회 주요 경기들을 미국에 생중계 해줄 정도로 관심도가 매우 컸습니다.

이것이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었는데, 왜냐하면 그 당시만 해도 세계 농구 선수권은 유럽 국가들이나 열을 올린 대회였지, 올림픽에만 신경을 쓰던 농구 본고장인 미국에선 정작 별 관심을 두지 않던 대회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큰 관심 때문이었을까요? 미국은 남녀 농구 모두 결승전에서 숙적인 구소련을 꺾으며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습니다. 특히, 여자농구에선 '여자 마이클 조던'이란 별명을 달고 다녔던 셰릴 밀러 (前 인디애나 페이서스 가드 레지 밀러의 누나)의 대활약상을 빼놓을 수가 없는데, 여자농구 얘기까지 하면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일단 여기서 정리하겠습니다.

 

데이빗 로빈슨의 미국과 아비다스 사보니스의 구소련이 결승에서 맞붙으며 막을 내린 대회이긴 했으나, 사실 많은 농구 전문가들은 대회가 시작되기 전부터 유고슬라비아를 최강의 전력으로 뽑았었습니다. 당시의 유고팀엔 80년 모스크바 올림픽 금메달의 주역들은 물론유럽 최고 수퍼스타였던 드라전 페트로비치, 청소년 대표팀에서 발탁된 약관 18세의 블라데 디바치 등이 신구의 조화를 이루며 막강한 라인업으로 포진해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구소련이나 미국팀보다도 더 화려한 팀구성이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준결승에서 격돌한 구소련 대 유고슬라비아 간의 혈투는 당시로선 단일 농구경기로서 최고의 시청률을 올렸고, 경기 수준 또한 매우 높았습니다. 또한, 이 경기는 국제농구 경기 사상 최고의 역전 드라마를 연출해내기도 했지요. 모든 역전 드라마가 그렇듯이, 이 경기에서도 비운의 주인공은 따로 있었습니다.

 

오늘, 이 경기의 백미였던 대역전의 순간을 잠시 회고해볼까 합니다.

 

이 경기는 당시의 유럽을 양분하고 있던 22세 동갑내기 수퍼스타, 페트로비치와 사보니스의 대결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양 국가를 대표하는 대들보들 답게, '전천후 폭격기' 페트로비치는 집중적인 수비를 받으면서도 29득점을 해 유고슬라비아 공격의 선봉장 역할을 톡톡히 해냈고, 故 레드 아워백 옹에 의해 '7피트 4인치의 빌 월튼'이라 불리우던 사보니스는 3점 슛 4개를 포함, 25득점, 10리바운드, 5어시스트, 6블락으로 구소련을 이끌었습니다.

 


영상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사보니스는 유고의 수비가 지역방어를 펼치면 외곽으로 나와 3점슛(4개 시도해 모두 성공)을 던졌고, 유고가 수비진영을 넓히면 안으로 들어와 훅 슛과 파워무브로 공격하는 다양성과 영리함을 보여줬습니다. 또한, 6개의 블락을 성공함과 동시에 수많은 유고 선수들의 슛 궤도를 바꾸는 에너지 넘치는 수비력까지 선보였습니다.

 

사보니스의 이러한 공수에 걸친 맹활약에 힘입어 유고의 내노라 하는 센터들은 모두 5반칙 퇴장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후반전의 중반부터는 '루키' 디바치가 사보니스를 막아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고의 전력은 탄탄했습니다.

 

후반전이 거의 끝나갈 무렵, 그러니까 40여 초를 남겨둔 상황에서 유고슬라비아의 백전노장 큐추라가 삼점 슛을 성공시켰을 때 유고는 9점 차까지 점수를 벌여놓을 수 있었습니다.

 

85 76.  남은 시간은 45승부는 거의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은 바로 이 때였습니다.

 

다음 포제션에서 구소련의 국보급 센터 사보니스가 백보드를 맞추며 장거리 삼점 슛을 성공시킨 것입니다.

 

85 79.

 

유고슬라비아가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드라전 페트로비치의 형, 알렉산더가 공을 드리블하며 나갔습니다. 이 때, 사보니스와 같은 리투아니아 출신인 코미츄스가 공을 스틸하며 재빨리 티코넨코에게 패스를 해주었고, 티코넨코는 조금의 지체함도 없이 곧바로 삼점을 던졌습니다. 이것도 깨끗하게 들어갑니다.

 

85 82. 점수차는 3점으로 좁혀졌습니다.

 

위태위태한 순간이었으나, 공격권은 아직도 유고슬라비아의 손에 있었습니다.

 

구소련은 계속해서 파울로 유고의 리듬을 끊으며 실책을 유도했습니다.

 

이제 남은 시간은 15초.... 공만 빼앗기지 않는다면 유고의 승리는 이대로 굳어질 전망이었습니다.

 

타이트한 압박수비를 펼치는 구소련의 수비 앞에 유고 선수들이 조금씩 당황을 하는 가운데, 아무도 막고 있지 않던 어린 센터, 블라데 디바치에게 공이 건네졌습니다.

 


블라데 디바치
... 18세의 청소년 대표 출신... 몸이 유연하고 볼핸들링과 패싱력이 좋아서, 유고슬라비아 농구협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고의 레전드 센터 출신 감독인 코시치 씨가 대표팀에 합류시킨 인물입니다.

 

국가대표 경험이 없어서였을까요? 아니면, 자신의 볼핸들링에 너무 자신감을 가졌기 때문일까요? 디바치는 이 숨막히는 판국에 이리저리 드리블을 쳤습니다. 이를 놓칠 구소련 수비가 아니죠. 소련 가드진 둘이 디바치에게 바싹 붙자마자, 디바치는 너무나도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맙니다. 잡았던 공을 다시 드리블하려 한 것입니다.

 

이 수준높은 경기에서, 이 숨막히는 클러치 상황에서, 디바치는 더블 드리블 바이얼레이션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구소련에게 기사회생의 기회가 왔습니다.

 

별명이 '시베리아 백여우'인 포인트가드 볼터스가 공을 몰고 들어갑니다. 그를 쫓아가던 드라전 페트로비치를 거대한 사보니스가 픽을 걸어주며 스크린을 섰고, 볼터스는 사보니스를 방패삼아 회심의 삼점을 던집니다.

 

동점이었습니다.

 

불과 40초 동안에... 상대팀의 두 개의 턴오버를 묶어 세 개의 삼점 슛으로 연결시키며 승부를 원점으로 돌린 구소련 팀이었습니다.

 

그렇게 전개가 된 세계 농구 선수권 사상 최대의 역전 드라마는 이제 승부를 연장전으로 끌고 갑니다.

 

이 마지막 40여 초의 숨막히는 순간을 동영상으로 감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사보니스의 3점포부터 시작합니다.

 

연장전이 시작되긴 했으나, 이미 전의를 상실한 유고슬라비아는 기가 있는대로 살아난 구소련의 적수가 될 수 없었습니다. 미국과의 결승전 티켓은 결국 구소련이 거머 쥐었습니다.

 

이 위대한 역전 드라마의 비운의 주인공, 블라데 디바치가 이 경기를 회고하며 인터뷰를 가진 적이 있는데... 인터뷰에서 디바치는 자신의 결정적인 실책 이후엔 정말로 아무 것도 눈에 보이지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후반전이 동점으로 종료되는 순간, 한 선배선수가 자신에게 다가와 "너 같은 XX는 죽어버려!" 하는 외침을 들은 후엔 그 자리에서 자살하고 싶은 충동까지 느꼈다고 합니다.

 

연장전 내내 울면서 뛰었다고 하죠. 2002년 월드컵 이탈리아 전에서 페널티킥을 실축한 후 경기 내내 울면서 뛰었다고 한 안정환 선수가 오버랩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안정환 선수와는 달리, 디바치에겐 설욕의 기회조차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40초 간에 걸쳐 벌어진 농구 선수권 사상 최고의 각본없는 역전 드라마는 그렇게 막을 내렸습니다.

 

비 온 뒤의 땅이 굳는다고 했던가요?  이 일을 계기로 디바치는 더 한층 성숙한 선수로 발전할 수 있었고, 결국 꿈에도 그리던 NBA 리그에 입성할 수 있게도 되지요. 88년 올림픽에선 또 다시 사보니스의 벽을 넘지 못하며 은메달에 머물렀지만, 90년 세계 선수권에선 토니 쿠코치, 페트로비치와 함께 그렇게도 바라던 정상의 자리에 조국을 올려놓는 주역이 됩니다. 많은 농구인들은 입을 모아 1990년 당시의 이 유고슬라비아 팀을 드림팀이 출현하기 전까지의 역대 최고 FIBA 국가대표팀이었다고 평합니다.

 

그러나 1986년의 한 여름날, 운명의 여신이 그에게 내린 너무도 가혹한 결정은 평생을 두고 그의 가슴 속에 천추의 한으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글의 내용이 너무 우울한 듯 해서 재미있는 영상으로 게시물을 끝맺겠습니다.

위에 언급한 숨막히는 40여 초 바로 직전에 나온 장면입니다.
심판의 판정에 항의하는 아비다스 사보니스의 모습이지요. 인상을 쓰며 주심에게 소리를 질러보지만, 주심이 노려보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손사레를 치며 방향을 바꿔 자기 갈 길(?)을 가는 능청스럽고 유머스러운 모습입니다. 당시에 TNT 중계를 맡았던 릭 베리와 빌 러셀로 하여금 박장대소를 터뜨리게 한 장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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