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단 40주년 클리블랜드, 40개의 추억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가 창단 40주년을 맞는다. 1970년 버펄로 브레이브스(L.A. 클리퍼스의 전신),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와 함께 첫 발을 내딛은 클리블랜드는 지난 40년간 팬들과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눠왔다. 4명의 구단주와 18명의 감독을 맞이하는 동안 1460승 1706패를 기록한 클리블랜드는 컨퍼런스 우승 1회, 디비전 우승 2회를 경험했다.
클리블랜드 공식 홈페이지(http://www.nba.com/cavaliers)는 창단 40주년을 맞아 팀 역사 속 40개의 순간을 선정해 발표했다. 클리블랜드 팬들을 울리고 웃겼던 추억 속으로 들어가보자.
1. 2006-2007 시즌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 5차전, 르브론 제임스가 팀의 마지막 30득점 중 29점을 혼자 올렸다. 특히 마지막 25점은 모두 르브론의 득점이었다. 이날 2차 연장 끝에 109-107의 짜릿한 승리를 이끌어낸 르브론은 NBA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활약 중 하나를 펼쳤다. 48득점으로 경기를 마친 르브론은 6차전에서도 승리, 클리블랜드를 창단 이후 첫 파이널 무대로 이끌었다.
2. 전 시즌을 15승 67패로 끝낸 클리블랜드는 인근 애크런 출신의 한 소년에게 클리블랜드 유니폼을 입히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 소년은 전문가들 사이에서 ‘그의 세대 중 최고’로 평가 받고 있었다. 드래프트 순위 발표장에서 NBA 총재 대리 러스 그래닉이 멤피스 그리즐리스가 2순위 지명권을 얻었음을 발표했을 때(클리블랜드가 1순위를 따낸 순간), 클리블랜드의 운명은 완전히 바뀌었다.
3. 1992년 동부컨퍼런스 세미파이널 6차전에서 보스턴 셀틱스에게 일격을 당한 후, 클리블랜드는 60퍼센트에 육박하는 야투 성공률을 보이며 122-104로 대승을 거뒀다. 클리블랜드가 동부컨퍼런스 파이널 진출을 확정 지은 이 경기는 래리 버드의 화려했던 경력이 막을 내린 경기이기도 했다.
4. 1976년 4월 29일 ‘리치필드의 기적’이 완성됐다. 베테랑 가드 딕 스나이더가 워싱턴 불리츠의 웨스 언셀드를 제치고 5피트 슛을 성공시켰고, 87-85로 앞선 클리블랜드는 창단 이후 처음으로 진출한 플레이오프에서 동부컨퍼런스 파이널에 진출하게 됐다.
5. 휴스턴에서 열린 제 55회 올스타 전에서 르브론 제임스가 21점차로 뒤져 있던 동부컨퍼런스의 역전승을 이끌었다. 29득점 6리바운드를 기록한 르브론은 NBA 역사상 최연소인 21세에 올스타 전 MVP에 올랐다.
6. 66승 16패로 정규시즌 1위를 차지한 2008-2009 시즌, 르브론 제임스는 경기당 28.4득점 7.6리바운드 7.2어시스트를 올리며 팀 역사상 처음으로 MVP를 수상했다.
7. 르브론 제임스가 48득점을 올리며 승리를 거둔 다음 치른 2007년 동부컨퍼런스 파이널 6차전, 이번에는 신인 ‘부비’ 깁슨이 디트로이트를 침몰시켰다. 6차전 31득점 중 19점을 4쿼터에 집중시킨 깁슨의 활약으로 98-82 승리를 거둔 클리블랜드는 팀 역사상 처음으로 파이널 무대를 밟게 됐다.
8. 1986년 6월 19일, 클리블랜드는 웨인 엠브리를 단장으로 영입했다. 엠브리는 나중에 로이 힌슨과 현금을 필라델피아 76서스로 보내고 그 해 드래프트 1순위 지명권을 받는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그리고 이 지명권으로 노스캐롤라이나 대의 센터 브래드 도허티를, 8순위 지명권으로 마이애미 대 가드 론 하퍼를, 그리고 나중에 얻은 2라운드 지명권으로 조지아 공대 가드 마크 프라이스를 지명했다. 이 선수들은 1980년 말 클리블랜드의 중흥기를 일구어냈다.
9. 1984-1985 시즌, 클리블랜드는 9연패를 포함해 2승 19패로 최악의 부진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33세에 불과했던 조지 칼이 임시 감독에 오른 후부터 모든 것이 달라졌다. 마치 드라마와 같은 대역전극을 이뤄낸 클리블랜드는 4월 9일 7시즌 만의 플레이오프 진출을 확정 지었다.
10. 1979-1980 시즌, 클리블랜드는 홈경기 역사상 최고의 승리 중 하나를 거뒀다. 4차 연장의 혈전 끝에 승리한 상대는 그 해 우승팀 LA 레이커스였다. 클리블랜드의 마이크 미첼, 데이브 로비쉬, 랜디 스미스는 모두 30점 이상을 올렸다.
11. 창단 첫 시즌에서 단 15승에 그친 뒤 열린 1971년 드래프트에서 클리블랜드는 노틀담 대 출신의 득점기계 오스틴 카를 1순위로 지명했다. 대학 시절 경기당 34.5득점을 올렸던 카는 데뷔 후 첫 세 시즌 동안 경기당 21.2득점을 올렸다.
12. 개막 15연패로 창단 첫 시즌을 시작한 클리블랜드는 1970년 11월 12일 마침내 팀 역사상 첫 승리를 차지했다. 클리블랜드와 마찬가지로 창단 첫 시즌을 보내던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클리블랜드는 바로 다음 경기부터 또다시 15연패를 당했다.
13. 첫 네 시즌을 클리블랜드 시내에 위치한 클리블랜드 아레나에서 치른 클리블랜드는 구단주 닉 말리에티가 직접 지은 리치필드 콜로세움으로 홈 구장을 이전했다. 클리블랜드는 1974년 10월 29일에 열린 개장 경기에서 챔피언 보스턴에게 졌다. 하지만 클리블랜드는 그 해 41회의 홈경기 중 29경기에서 승리를 거뒀다.
14. 팀이 암흑기를 보내던 1981년 포워드 마이크 미첼이 올스타에 뽑히며 홀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리치필드 콜로세움에서 열린 올스타 전에서 미첼은 15분 동안 14득점을 올리며 홈 팬들의 성원에 보답했다.
15. 1975-1976시즌 49승 33패를 거두며 팀을 창단 이후 첫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킨 빌 피치가 올해의 코치상을 수상했다.
16. 창단 후 리그 최약체를 벗어나지 못하던 빌 피치의 클리블랜드는 1976년 3월 31일 뉴올리언즈 재즈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팀 역사상 처음으로 플레이오프 진출을 확정 지었다. 클리블랜드는 2주 뒤 전국 방송 경기에서 뉴욕 닉스에게 승리를 거두며 센트럴 디비전 1위에 올랐다.
17. 워싱턴 불리츠를 상대로 치른 1976년 플레이오프 2차전 경기는 초창기 클리블랜드를 미라클 팀이라고 부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바비 ‘빙고’ 스미스가 종료 2초를 남기고 30피트 거리에서 던진 슛이 림을 가르며 80-79를 만들었고, 클리블랜드는 팀 역사상 처음으로 플레이오프에서 승리를 거뒀다.
18. ‘NBA 위대한 50인’이 클리블랜드의 홈 구장 군드 아레나에서 소개된 1997년 올스타 전은 농구 역사상 위대한 선수들의 모습이 가장 많이 보인 경기였다. 제리 웨스트, 줄리어스 어빙, 오스카 로버트슨 등 살아있는 전설들이 마이클 조던이나 샤킬 오닐 같은 새로운 세대의 선수와 자리를 함께 했다. 본 게임에서는 클리블랜드 가드 테럴 브랜든이 벤치에서 출격, 17분 동안 10득점을 올렸다.
19. 르브론 제임스와 부비 깁슨의 영웅적인 활약으로 디트로이트를 침몰시킨 클리블랜드는 팀 역사상 처음으로 파이널에 진출했다. 하지만 파이널 상대는 마이크 브라운 감독의 전 소속팀인 샌안토니오 스퍼스였고, 샌안토니오는 클리블랜드를 4-0으로 일축하며 우승을 차지했다.
20. 조지 군드와 고든 군드 형제가 팀을 인수한 후 새롭게 태어난 클리블랜드는 최고의 득점원 중 하나였던 월드 B. 프리와 계약했다. ‘공중의 왕자’는 클리블랜드에서 보낸 4시즌 동안 경기당 23득점을 기록하며 클리블랜드의 농구 인기를 유지했다.
21. 1998년 올스타 주간에 열린 루키 챌린지에는 클리블랜드의 지드루너스 일가우스카스, 세드릭 핸더슨, 브레빈 나이트, 데릭 앤더슨이 출전했다. 한 팀에서 네 명의 루키가 출전하는 루키 챌린지가 시작된 이후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게임에서는 18득점 7리바운드를 올린 일가우스카스가 MVP를 수상했다.
22. 클리블랜드 사령탑을 맡은 지 4년 만에 마이크 브라운 감독이 2008-2009 시즌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하며 빌 피치 이후 이 상을 받은 두 번째 클리블랜드 감독이 됐다. 브라운의 팀은 수비 여러 부문에서 리그 1위에 오르며 전 시즌에 비해 21승을 더 거두는 괴력을 발휘했다.
23. 1991년 12월 23일, 크레이그 일로가 팀 역사상 손꼽히는 명 장면을 만들어냈다. 일로는 유타 재즈와의 홈경기에서 짜릿한 3점 버저비터로 113-112 승리를 일궈내며 홈 팬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선사했다. 일로의 이날 활약은 클리블랜드 라디오 캐스터 조 태이트의 다음 멘트에 의해 영원히 기억 속에 남게 됐다. “그래요, 버지니아! 산타클로스는 있습니다! 텍사스 주 러벅(일로의 고향) 출신이라죠, 아마?”
24. 2009년 동부컨퍼런스 파이널 2차전, 종료 1초 전 히도 터콜루의 러닝 점프 슛으로 올랜도 매직이 95-93으로 앞서갔다. 하지만 인바운드 패스를 받은 르브론 제임스가 버저비터 3점 슛을 터뜨렸고, 96-95로 이긴 클리블랜드는 시리즈를 1-1 동률로 만들었다. 홈 구장을 가득 채운 20,562명의 홈 관중들을 열광에 빠뜨린 순간이었다.
25. 데뷔 후 두 시즌 동안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했던 르브론 제임스는 더크 노비츠키와댈러스 매버릭스를 상대로 46점을 폭발시키며 107-94 승리를 이끌었다. 지드루너스 일가우스카스의 데뷔 시즌 이후 8년 만의 플레이오프 진출을 확정 짓는 순간이었다. 클리블랜드는 이후 세 시즌 연속으로 1라운드에서 워싱턴을 상대하게 된다.
26. 오직 마이클 조던과 오스카 로버트슨만이 르브론 제임스와 마찬가지로 데뷔 시즌에 경기당 20득점 5리바운드 5어시스트 이상을 기록했다. 이러한 활약으로 르브론은 리그 역사상 최연소이자 팀 역사상 유일한 올해의 신인상을 수상했다. 르브론은 첫 시즌에 평균 21득점 6어시스트에 육박하는 기록을 올렸고 팀은 전년도에 비해 두 배 이상 많은 승리를 거뒀다.
27. 1975년 11월 27일, 훗날 명예의 전당에 오른 올스타 7회 출전자 네이트 써몬드가 영입되자, 클리블랜드의 젊은 선수들은 급격한 성장을 경험했다. 클리블랜드 인근 애크런 출신인 써몬드는 그러잖아도 강력했던 팀의 프런트라인에 힘을 더했고 팀 역사상 최초의 플레이오프 진출을 이끌었다.
28. 가드 마크 프라이스가 1993년과 1994년 올스타 전 3점슛 대회를 2연패하며 래리 버드, 크레이그 허지스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프라이스가 기록한 24점은 14년 후인 2008년 전 클리블랜드 선수인 제이슨 카포노가 25점을 기록할 때까지 대회 기록이었다.
29. 1993년 솔트레이크 시티 올스타 전, 전날 3점슛 대회에서 우승한 프라이스는 3점슛 9개 중 6개를 성공시키며 19득점을 올렸다. 래리 낸스와 브래드 도허티도 동부 올스타로 출전하며 지난 4년 동안 두 번째로 3인방이 모두 올스타에 뽑히는 영광을 안았다.
30. 2006년 플레이오프 1라운드, 클리블랜드 홈 구장인 퀴큰 론즈 아레나는 거의 10년 만의 플레이오프 경기로 열광에 싸여있었다. 생애 첫 플레이오프 경기에 출전한 르브론 제임스는 첫 슈팅을 에어볼로 시작했으나 32득점 11리바운드 11어시스트로 트리플 더블을 거두며 워싱턴을 상대로 97-86 승리를 이끌어냈다. 르브론은 1라운드 평균 35.7득점을 올렸다.
31. 2005년 1월 5일, 미국 최대의 온라인 모기지 업체 퀴큰 론즈의 소유주인 댄 길버트가 전 구단주 고든 군드로부터 3억 7천 5백만 달러에 팀을 인수했다. 이 모기지 재벌은 초보 감독과 단장인 마이크 브라운과 대니 페리를 고용하며 팀 문화를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길버트가 새 구단주가 된 후 재건축한 홈 구장이 퀴큰 론즈 아레나로 이름을 바꿨고 연습 구장이 새로 지어졌다. 결과는 팀이 처음 경험하는 성공이었다.
32. 2008년 3월 26일, 팀 창단 이래 ‘클리블랜드의 목소리’로 불렸던 조 태이트가 통산 3,000번째 클리블랜드 게임을 중계했다. 뉴저지와 시카고에서 각각 한 시즌씩을 보낸 후 1983-1984 시즌에 복귀한 태이트는 이후 줄곧 라디오 중계를 진행하고 있다.
33. 조지 칼의 지휘 아래 시즌 초반 2승 19패의 부진을 극복하고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클리블랜드는 1985년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전년도 우승팀 보스턴 셀틱스를 상대했다. 월드 B. 프리의 경기당 26.3득점에도 불구하고 클리블랜드는 보스턴에게 네 경기만에 탈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클리블랜드가 진 세 경기는 모두 3점차 이내의 패배였다.
34. 1986년 6월 16일, 루이지애나 주 배심원단은 존 ‘핫로드’ 윌리암스의 승부조작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윌리암스는 전년도 드래프트 2라운드에서 클리블랜드의 지명을 받은 상태였다. 윌리암스는 클리블랜드에서 9시즌을 뛰며 리바운드, 블록슛, 출장 시간 등에서 팀 내 기록을 세웠다.
35. 1982-1983 시즌에 거둔 23승 59패의 성적은 구단주 테드 스테피엔이 팀을 팔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4월 7일, 콜로세움 구장의 소유자인 조지와 고든 군드 형제는 옵션을 행사해서 클리블랜드를 매입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리그 구단주들이 최악의 상황을 맞은 클리블랜드를 돕기 위해 1983, 84, 85, 86년 드래프트 1라운드 지명권을 추가로 주기로 했고, 군드 형제는 이 권리를 모두 행사했다.
36. 데이먼 존스는 클리블랜드에서 세 시즌만을 뛰었지만 팀 최고의 순간에 포함될 자격이 있다. 2006년 5월 5일 워싱턴과의 플레이오프 1라운드 6차전, 벤치에서 출전한 존스는 연장전 종료 4.8초를 남기고 슛을 성공시키며 114-113 승리를 이끌었다. 1라운드에서 승리를 거둔 클리블랜드는 13년 만에 2라운드에 진출했다.
37. 여러 번 발에 수술을 받은 지두르너스 일가우스카스는 한때 다시는 농구를 하지 못할 것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기적과 같이 재활에 성공한 일가우스카스는 2002-2003 시즌에 그의 경력에서 가장 뛰어난 성적을 거뒀다. 팀은 17승 65패에 그쳤지만, 경기당 17.2득점 7.5리바운드를 올린 일가우스카스는 생애 처음으로 올스타에 선정됐다.
38. 새크라멘토에서 열린 개막전을 시청하던 회의주의자들은 매스컴의 집중 조명이 르브론 제임스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2003년 10월 29일에 벌어진 이 경기에서 ‘선택 받은 자’는 첫 공식 경기부터 모두의 입을 다물게 했다. 르브론은 25득점 6리바운드 9어시스트를 올렸는데, 25득점은 고졸 선수가 데뷔 전에서 세운 역대 최다 득점 기록이었다.
39. 팀 창단 25주년 경기를 승리로 장식한 직후인 1994년 11월 8일, 클리블랜드는 새로 지은 군드 아레나로 홈 구장을 옮겼다. 20,562명을 수용할 수 있는 군드 아레나는 훗날 퀴큰 론즈 아레나로 이름을 바꿨고, 현재까지 클리블랜드 홈 구장으로 쓰이고 있다.
40. 드와이트 하워드의 올랜도에게 동부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무릎을 꿇은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드래프트 하루 전 대형 사고를 쳤다. 클리블랜드는 벤 월러스와 사샤 파블로비치를 내보내고 15회 올스타이자 미래의 명예의 전당 헌액자 샤킬 오닐을 영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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