킨샤사의 성자-세계인 무톰보 이야기
아프리카 한가운데 위치한 콩고 민주공화국의 수도 킨샤사. 오랜 내전으로 황폐해진 이곳에는 300석의 병상을 보유한 초현대식 병원이 세워져 있습니다.
지난 2007년 개관한 이 병원은 소아과, 외과, 산부인과와 전염병 연구 센터로 이루어져 있으며, 매년 5세 이하 어린이 중 20%가 에이즈 등 전염병으로 죽어가며 평균 수명이 50살도 안 되는 이 나라의 의료/보건 환경을 발전시키는 데 큰 공헌을 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습니다.
병원의 설립자는 이 나라 출신의 노장 NBA 선수로, 그는 무려 1500만 달러를 기부해서 조국에 세운 이 병원에 어머니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NBA가 키워낸 세계인, 디켐베 무톰보의 이야기입니다.
'디켐베 무톰보 무폴론도 무캄바 장 자크이 워무톰보,' 아프리카 출신
Dikembe Mutombo는 1966년 6월 25일, 아프리카의 신생국 콩고의 수도 레오폴드빌에서 학교 교장이었던 사무엘 무톰보와 비암바 마리 무톰보의 10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습니다. 그가 속한 부족은 태어난 아이에게 친족의 이름을 물려주는 것이 관례였고, 결국 무톰보는 ‘디켐베 무톰보 무폴론도 무캄바 장 자크이 워무톰보(Dikembe Mutombo Mpolondo Mukamba Jean Jacque Wamutombo)'라는 터무니없이 긴 이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무톰보의 아버지는 월수입이 37달러로 당시 콩고에서는 중산층에 속했지만, 10명이나 되는 자녀를 부양하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무톰보 부부는 굶주린 이웃을 어떻게든 도우려 항상 노력했고, 소년 무톰보는 어려서부터 주위 사람들을 배려할 줄 아는 아이로 자라갔죠.
당시 콩고는 1960년 벨기에로부터 독립한 이래 5년 동안 무려 세 번이나 정변이 일어나는 혼란 끝에, 미국 CIA가 후원하는 모부투 군사 정권이 권력을 잡은 직후였습니다. 국민들은 국가의식보다는 약 200개에 달하는 부족의식이 더 강했으며, 무엇을 해야 할지 아무도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다른 많은 아프리카 국가의 국민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풍족한 자원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고 있었고, 서구 세계가 착취의 대가로 뿌려주는 원조 물자에 의지해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영특한 두뇌를 자랑했던 소년 무톰보는 이런 환경 속에서 병에 걸려 죽어가는 주위 사람들을 보면서 약사가 되기로 다짐했고, 미국의 경제 원조 정책인 USAID 장학금을 받으며 학문을 쌓아갔습니다. 고등학교 때 이미 7피트에 가까울 정도로 키가 크고 운동신경이 좋았던 무톰보는 모든 운동, 특히 농구와 축구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미군 원조 학교인 Salvation Army School과 Jesuit-run Institut Boboto의 명물이 되었습니다. 집안 식구 모두가 키가 컸던 관계로 형 일로와 함께 농구 청소년 대표 팀에 뽑히기도 했죠. 그 사이에 모부투 정권은 국명을 자이르로, 수도 이름을 킨샤사로 바꿨지만 소년 무톰보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습니다.
어느 날, 무톰보의 장학금 담당관이 무톰보를 찾아왔습니다. 미국에서 왔다는 담당관은 무톰보를 유심히 관찰하더니, 미국에서 공부해볼 생각은 없냐고 물었죠. 언젠가는 미국에서 공부해보고 싶다고는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무톰보 자신도 그 기회가 그렇게 일찍 찾아올 줄은 몰랐습니다. 무톰보는 망설일 것도 없이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죠.
세계인 무톰보의 첫걸음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Rejection Row’
무톰보와 모닝, 1991년
조지타운 새내기 시절의 무톰보
‘세계인’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하고 있던 무톰보의 인생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큰 변화를 맞이했습니다. 조지타운 농구부의 명장 존 톰슨이 무톰보를 찾아온 것이죠. 애당초 무톰보가 미국으로 올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학업능력과 함께 농구 실력이 높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농구 원로인 자리드 헐버스타트가 경제원조 담당관이던 허먼 헤닝에게 무톰보의 비디오를 보여줬고, 헤닝이 조지타운의 톰슨 감독에게 추천서를 보냈던 것이죠. 1985년에 패트릭 유잉이 졸업한 후 센터 난에 시달리고 있던 톰슨 감독은 무톰보에게 선뜻 농구장학금을 주기로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무톰보는 농구 선수가 된다는 것을 별로 내켜하지 않았습니다. 고국에 있었을 때도 NBA라는 프로리그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몸을 부딪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던 무톰보는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지는 농구 경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죠. 하지만 톰슨 감독은 ‘프로 농구 스타가 되면 세계적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으며 무톰보는 프로 농구 스타가 될 자질이 충분하고 자신은 프로 농구 스타를 만들 가능성이 가장 높은 대학 감독 중 하나’라며 무톰보를 설득했습니다.
마침내 마음을 정한 무톰보는 조지타운 호야스 농구부에서 본격적으로 농구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농구부 입단 후에는 전공도 바꿨습니다. 외교학과 언어학의 복수 학위로 졸업한 무톰보는 영어, 불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와 아프리카 5개 부족 언어를 구사하는 국제적 인재가 되어있었죠. 무톰보는 정말로 ‘세계적인’ 농구선수가 되고 싶어 했습니다.
당시 무톰보는 이미 7피트가 넘는 장신에 엄청난 윙스팬과 유연성까지 갖췄지만, 기본기나 전술 이해도는 아예 처음부터 시작해야 할 정도로 형편없었습니다. 톰슨 감독은 끈기를 가지고 하나하나 기본기를 전수해갔죠. 특히 무톰보를 수비형 센터로 키우기로 결정하고 리바운드와 블록 기술을 집중적으로 가르쳤습니다. 톰슨 감독은 심지어 NBA 레전드인 빌 러셀까지 동원했습니다. 농구부에 러셀을 닷새 동안 초청했는데, 그중 사흘을 무톰보에게 붙인 거죠. 러셀은 그때까지 프로 선수가 될지 망설이고 있던 무톰보에게 ‘자네는 할 수 있어. 자네는 농구를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야’라며 설득했고, 마침내 무톰보는 프로 선수의 길을 걷기로 결정했습니다.
2학년이 되던 해부터 1년 후배 알론조 모닝의 백업으로 출전하기 시작한 무톰보는 3학년부터 주전으로 출장, 모닝과 함께 공포의 골밑 수비를 자랑했습니다. 그는 세인트존스와의 경기에서 무려 12개의 슛을 걷어내며 대학농구 역대 신기록을 세웠고, 강팀이 즐비한 빅 이스트 컨퍼런스에서 공동 수비왕을 수상했습니다. 무톰보와 모닝의 더블포스트는 상대에게서 골밑 득점 기회를 앗아가 버렸고, 조지타운 대학교의 팬들은 그들에게 ‘Rejection Row’라는 별명을 붙였습니다.
졸업반이 되자 무톰보의 골밑 수비는 경이적일 정도로 발전했습니다. 모닝이 부상으로 시즌 대부분을 결장하는 바람에 골밑 부담을 혼자 짊어지게 되었지만, 그는 평균 15.2점과 12.2리바운드, 그리고 4.71블록을 기록했으며 수비왕과 컨퍼런스 퍼스트 팀에 선정되었죠.
당시 무톰보의 수비력을 가장 잘 보여준 경기는 1991년 빅 이스트 컨퍼런스 토너먼트 8강에서 펼쳐진 코네티컷과의 경기였습니다. 조지타운은 야투율 25퍼센트의 슛난조에 시달렸지만 11점차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골밑에서 27개의 리바운드를 잡아낸 무톰보가 있었기 때문이죠. 긴 팔과 높이, 운동능력을 바탕으로 한 무톰보의 골밑 수비는 금세 NBA 스카우트들의 눈길을 끌었습니다. 수비력에서 학교 선배 패트릭 유잉의 대를 이을 선수로 평가받곤 했죠. 1991년 졸업한 무톰보는 드디어 NBA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습니다.
1991년 학위수여식의 무톰보
런&건 팀의 골키퍼
1991년 NBA 드래프트, 무톰보는 자이르에서 날아온 부모님이 보는 앞에서 전체 4순위로 덴버 너게츠에 지명되었습니다. 1번 픽의 영광은 차지한 래리 존슨을 비롯해서 케니 앤더슨, 스티브 스미스, 스테이시 오그먼, 테럴 브랜든, 그렉 앤써니 등 가드나 포워드들이 대세를 이룬 그 해 드래프트에서 무톰보는 루크 롱리, 데일 데이비스 등과 함께 몇 안 되는 인사이드 자원이었습니다.
1980년대 명감독 더그 모의 지휘 아래 알렉스 잉글리시, 팻 레버 등을 앞세워 쇼타임 레이커스를 제치고 팀 득점 1위를 독점할 정도로 빠른 농구를 펼쳤던 덴버는, 무톰보가 입단하던 무렵에는 선수들의 노쇠화로 리빌딩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폴 웨스트헤드 감독은 기존의 런&건 시스템을 유지하면서 속공이 특기인 포워드와 가드를 중심으로 러닝플레이를, 무톰보에게 골밑 수비 하프코트 공격을 맡기기로 했죠. 무톰보는 루키 시즌 평균 16.6점과 12.3리바운드, 3블록을 기록하는 활약으로 감독의 기대에 부응하며 단숨에 팀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올 루키 퍼스트 팀은 물론이고 올스타에 선발되기도 했는데, 하킴 올라주원, 데이비드 로빈슨과 함께 미드웨스트 디비전에서 뛴 루키 센터로써는 준수한 성적이었죠.
다른 모든 루키와 마찬가지로 무톰보도 ‘황제’ 조던과 만나야 했습니다. 자신의 대학 시절 라이벌이었던 유잉의 뒤를 잇는 조지타운 센터가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무톰보를 눈여겨보고 있던 조던은, 자유투 라인에 서자 눈을 감은 채 자유투를 던지고는 무톰보에게 외쳤죠. “NBA에 온 것을 환영하네!” 프로 농구 선수의 생활은 모든 것이 새로웠습니다.
이듬해 프랜차이즈 스타인 댄 아이슬 감독을 새로 영입한 덴버는 루키 라폰소 엘리스와 브라이언트 스티스를 영입하고 마흐무드 압둘 라프가 본격적으로 스타팅 라인업에 합류하면서 전 시즌보다 15승이나 향상된 성적을 올렸습니다. 무톰보는 여전히 팀의 기둥이었고, 이제 많은 득점원들과 함께하게 된 그는 득점 비중을 줄이고 수비에 집중하게 되었죠.
그들은 이듬해에도 성적을 끌어올려 시즌 42승을 거두며 4년 만에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습니다. 덴버 팬들로써는 환호할 만한 일이었지만, 1라운드 상대는 그 해 최고 승률 팀인 시애틀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들을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시애틀과의 그 시리즈는 무톰보의 커리어를 통틀어 가장 화려한 시대로 기록되며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습니다.
아메리칸 드림
그 해 시애틀의 성적은 63승 19패로 1번 시드, 덴버는 42승 40패로 8번 시드. 1984년 컨퍼런스 7,8위 팀이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기 시작한 이래 8번 시드가 1번 시드를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1라운드 따위에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던 거죠. 심지어 덴버의 아이슬 감독마저도 시리즈 시작 전에 ‘우리의 목표는 경험을 쌓는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였으니까요. 적지에서 치른 두 경기에서 평균 15점차로 완패하자, 덴버의 플레이오프 경험은 세 경기로 끝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때부터 누구도 기대하지 않던 일이 벌어졌습니다. 3차전을 110-93으로 승리하며 기사회생한 덴버는 4차전마저 연장 접전 끝에 승리하며 시리즈를 최종전으로 끌고 갔습니다. 이제야 슬슬 욕심이 생기기 시작한 아이슬 감독은 ‘이런 큰 경기에 우리 어린 선수들이 긴장할까봐 걱정’이라고 했지만, 그의 팀 센터는 조지타운 출신이었습니다. 무톰보는 ‘무례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이건 플레이오프다. 어떤 바보가 홈에서 승리를 내주고 싶겠냐? 걔네들이 시끄럽게 떠들어댈 것은 뻔한 일이다. 우린 그냥 가서 편안히 경기하면 된다.’며 동료들을 독려했습니다.
마침내 벌어진 운명의 5차전, 무톰보에게는 상대 에이스인 숀 켐프를 상대로 골밑을 사수하라는 특명이 내려졌고, 그는 라폰소 엘리스, 브라이언 윌리엄스와 함께 켐프를 묶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전반까지는 시애틀이 앞서나갔지만 시애틀의 포인트가드 게리 페이튼이 발에 경미한 부상을 입으면서 리듬이 흐트러졌고, 후반 들어 제 타이밍에 공을 공급받지 못하게 된 켐프는 번번이 무톰보에게 가로막히기 시작했습니다. 그 틈을 타서 로버트 팩과 엘리스가 득점포를 가동했고, 마침내 경기는 또다시 연장으로 가게 됐습니다.
연장전에서 무톰보는 수비력만으로 최고의 경기지배력을 보여줬습니다. 시애틀 선수들은 완벽한 돌파를 해내고도 무톰보의 블록슛 때문에 공을 밖을 뺄 수밖에 없었고, 데틀레프 슈렘프나 네이트 맥밀란 등 시애틀의 슈터들은 수비를 앞에 두고 외곽 슛을 던져야 했습니다. 림을 돌아 나온 공은 모조리 무톰보의 손아귀로 빨려 들어갔고, 덴버는 속공으로 손쉬운 득점을 올렸죠.
마침내 종료 휘슬이 울리고, 98-94로 승리한 덴버 선수들은 환호했습니다. 엄청난 활약을 펼친 무톰보는 코트 위에 벌렁 누워 공을 쥐고 포효했습니다. 그 장면은 지금도 플레이오프 하이라이트의 단골 메뉴로 등장하곤 하죠.
덴버는 리그 역사상 최초로 1라운드에서 1번 시드를 꺾은 8번 시드 팀이 되었고, 팬들은 전국에 방송된 이 시리즈를 통해 ‘수비형 센터 무톰보’의 진가를 깨닫게 됐죠. 다섯 경기를 통해 그가 기록한 블록슛은 무려 31개. 경기당 6개가 넘는 슛을 막아낸 것입니다. 비록 덴버는 2라운드에서 유타에게 4-3으로 아깝게 탈락했지만, 무톰보는 이 시리즈에서도 칼 말론을 상대로 7경기에서 38개의 블록을 기록하며 선전했습니다.
덴버는 이듬해에도 8번 시드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2년 연속으로 기적을 만들어내지는 못했습니다. 이 무렵부터 무톰보는 블록슛을 성공시킨 후 집게손가락을 좌우로 흔드는 세리모니를 시작했는데, 당시 막 복귀해 45번을 달고 뛰던 조던도 이 세리모니의 희생양이 됐죠. 여담이지만, 몇 년 후 조던은 무톰보에게 인유어페이스 덩크를 먹인 후 손가락 세리모니를 하며 보기 좋게 설욕했습니다.
그 해 무톰보는 리바운드 2위와 블록슛 1위를 기록하면서 처음으로 올해의 수비수 상을 수상했습니다. 이제 무톰보는 리그를 대표하는 수비형 센터로 자리매김한 것이죠.
그러자 덴버 구단의 걱정이 커졌습니다. 무톰보의 계약 기간은 1995~96 시즌으로 만료될 예정이었고, 구단 살림은 무톰보에게 거액을 안겨줄 정도로 풍족하지 못했으니까요. 마침 1995년 드래프트에서 빅맨 유망주였던 안토니오 맥다이스를 얻고도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자, 덴버는 맥다이스를 중심으로 팀을 리빌딩하기로 했습니다.
무톰보는 덴버에서의 추억을 뒤로 하고 자유계약선수가 되었습니다. 수많은 팀들이 그를 원한 끝에, 결국 애틀랜타가 무톰보의 새 팀으로 결정되었죠.
무톰보는 애틀랜타에서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애틀랜타에는 무키 블레일락과 스티브 스미스 등 덴버 시절보다 득점력이 뛰어난 선수가 많았고, 수비에 전념한 무톰보는 거의 매 경기 골밑을 자신의 땅으로 만들었습니다. 올스타전에도 꼬박꼬박 나갔으며 2년 연속 올해의 수비상 수상과 생애 최초 올 NBA팀 선정 등 무톰보는 1990년대 후반 동부를 대표하는 센터로 군림했습니다. 팀도 매년 50승 이상을 기록하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죠. 애틀랜타는 마이애미, 인디애나와 함께 최강 시카고에 동부에서 가장 근접한 팀 중 하나였고, 당대 최고의 수비 팀이었습니다.
2001시즌 중에 동부지구 1위 팀이었던 필라델피아로 트레이드된 후에도, 무톰보는 아이버슨 원맨 팀이었던 필라델피아의 수비라인을 총지휘하며 팀을 83년 이후 처음으로 파이널에 진출시켰습니다. 비록 파이널에서는 최고의 포스를 자랑하고 있던 샼의 레이커스에게 4-1로 무릎을 꿇었지만, 그 해의 필라델피아는 가장 위대한 패자였죠.
그는 이제 평균 천만 달러 이상을 받는 슈퍼스타가 되었습니다. 애틀랜타에 큰 집도 샀고 간호사 지망생이던 자이르 미녀 로즈와 결혼하면서 결혼하라고 성화를 대던 어머니에게 체면도 세웠죠. 그들은 나중에 아이 셋을 낳았고 조카 넷을 입양했습니다.
무톰보는 이제 본격적으로 주위를 돌아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출전을 위해 미국을 찾은 조국 자이르의 여자농구 대표 팀의 경비를 대주기도 했고, 1993년에는 국제 구호단체인 CARE의 대변인 자격으로 소말리아 난민 캠프를 찾았습니다. 매년 오프시즌 아프리카를 방문해 매일 2000명 이상의 아이들을 상대로 농구를 가르쳤죠. NBA 총재 데이비드 스턴과 조지타운 동문인 유잉, 모닝과 함께 막 인종차별에서 벗어나고 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고향의 가족들과 친척들도 호강시켜줄 일만 남았었죠.
이야기가 이것으로 끝난다면, 이 이야기는 후진국 출신으로 미국에서 슈퍼스타가 된 한 농구선수의 아메리칸 드림 이야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애틀랜타에서 첫 시즌을 보내고 있던 여름, 고향에서 일어난 비극이 모든 것을 바꿔 놓았습니다.
비극
1997년 5월, 자이르의 수도 킨샤사에서는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30여 년간 자이르를 철권통치해온 모부투 정권에 맞서 로랑 카빌라를 중심으로 한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죠. 킨샤사의 모든 시민들에게는 통행금지령이 내려졌습니다. 물론 총탄이 비 오듯 쏟아지는 밖으로 나갈 만큼 정신 나간 시민도 몇 없었지만 말이죠.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반드시 외출해야 하는 사람은 있었습니다.
사무엘 무톰보는 뇌졸중으로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아내 비암바 마리를 보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습니다.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병원이 있었지만 통행금지령 때문에 갈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습니다. 이대로 시간이 지날수록 아내는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었고, 사무엘은 결코 그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죠. 사무엘은 가족들의 만류를 마다하고 집을 나섰습니다.
사무엘은 평소 같으면 10분이면 도착했을 병원에 30여분 만에 도착했습니다. 의사를 부르려던 사무엘은 그제야 병원이 텅 비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킨샤사에서도 의료인들은 항상 부족했고, 내전을 벌이고 있는 양 세력은 그들을 가장 먼저 데려가 버린 것이죠.
그 병원은 모부투가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마마 예모’라 이름붙인 2000병상의 큰 병원이었습니다. 모부투는 자신의 치적을 자랑하기 위해 병원 운영에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그래서 ‘마마 예모’는 중앙아프리카 지역의 자랑이었죠. 하지만 그 병원은 가장 도움이 필요한 때 가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아무 도움도 주지 못했습니다.
모든 희망을 잃고 집으로 돌아온 사무엘이 맨 처음 들어야 했던 것은, 아내의 주검 앞에서 오열하는 가족들의 울음소리였습니다.
불스 왕조의 플레이오프 홈경기 14연승을 저지하는 등 선전한 끝에 아쉽게 탈락한 무톰보는 TV 뉴스를 통해 고국의 정변을 알았습니다. 무톰보는 검은 연기로 뒤덮인 킨샤사를 보면서 고향 집에 전화를 해보려 노력했지만 전화가 될 리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톰보는 어머니의 부음을 모든 소동이 진정된 후 들어야 했습니다. 임종은커녕, 무톰보가 간신히 비행기를 구해 돌아갔을 때는 장례식까지 마친 뒤였던 것이죠.
무톰보는 어머니의 무덤 앞에서 오열했습니다. 가족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친절했던, 죄와는 가장 거리가 멀었던 어머니가 왜 그렇게 세상을 떠야 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는 사실도 납득할 수 없었죠.
하지만 납득할 수 있든 없든, 무톰보는 움직여야 했습니다. 어머니는 생전에 항상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려 했었습니다. 단돈 3센트짜리 예방주사를 못 맞아서 죽어가는 아이들이 있었죠.
무톰보는 그들을 돕기로 결심했습니다.
디켐베 무톰보 재단
미국에 돌아온 무톰보가 맨 처음 한 일은 에이전트에게 구호 기금 설립을 지시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훗날 ‘디켐베 무톰보 재단’이라 불리게 된 이 기금을 통해, 다시 콩고로 이름이 바뀐 조국의 비극적인 상황을 세계에 알리고 가능한 모든 도움을 주려 했습니다. 그는 인터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콩고를 비롯한 아프리카의 참상에 대해 이야기했고, 시즌 오프 후 모금 계획을 짜 나갔습니다. 2003년에는 아프리카에 다녀온 후 말라리아에 걸려 사경을 헤맨 적도 있었죠.
어머니를 기리고 고국의 고통 받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한 작은 움직임은 서서히 주변 사람들을 감동시켰습니다. CBS는 인기 프로그램 ‘60분’ 특파원과 무톰보가 내전 후유증에 시달리는 킨샤사의 참상을 취재한 다큐멘터리를 방송했고, 각종 유수 언론사들이 인권 및 복지 관련 상의 수상자로 무톰보를 선정했죠. 리그 역시 2001년 NBA 인도주의상 수상자로 무톰보를 선정했으며 선수협회와 구단주 모임도 무톰보의 움직임을 지지했습니다.
미국 정부와 국제 여론도 무톰보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기 시작했습니다. ‘디켐베 무톰보 재단’의 모금활동에 카터, 아버지 부시, 클린턴 등 전직 대통령과 콜린 파월, 콘돌리자 라이스 등의 정부 각료가 참여했고,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이던 배럭 오바마와 제프 블룸버그 뉴욕 시장 등이 미국 정부에서 재정적인 지원을 할 수 있도록 지원했습니다. 미국 정부는 1999년 미국에서 봉사자에게 주는 가장 큰 상인 ‘대통령 봉사상’ 수상자로 무톰보를 선정했습니다.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와 넬슨 만델라 남아공 전 대통령도 무톰보의 모금 활동에 기꺼이 참여했으며, 코피 아난 사무총장이 이끌던 유엔에서는 유엔 개발 프로그램(UNDP)의 초대 대사로 무톰보를 임명하며 그를 공식적으로 지지했습니다. 전 세계가 무톰보의 꿈에 공감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학 시절 존 톰슨 감독이 예언한 대로, 무톰보는 정말로 ‘세계를 움직이는 농구선수’가 된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무톰보의 소속팀은 뉴저지, 뉴욕, 시카고, 그리고 사흘 후 휴스턴으로 변해갔고 기록도 점점 나빠졌지만, 그의 인류 평화에 대한 신념과 의욕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무톰보는 재단이 모금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도록 미국 시민권도 얻었습니다. 그는 리그의 ‘국경 없는 농구’ 프로그램에 참가하여 아프리카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려 노력했으며, 남아프리카의 불우 어린이들에게 15만 달러를 기부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NBA와 유니세프가 공동으로 추진하는 ‘United for Children, Unite against AIDS’ 캠페인에도 참가하여 부모의 잘못으로 날 때부터 에이즈로 고통 받아야 하는 어린이들을 돕기도 했죠.
하지만 무톰보가 가장 큰 노력을 기울인 사업은 고향에 병원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단지 치료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조국의 의료 환경을 향상시킬 수 있는 병원,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언제든지 도움을 줄 수 있는 병원 말이죠.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무톰보는 꼭 그런 병원을 짓고 싶었습니다.
비암바 마리 무톰보 병원
위의 사진은 병원을 짓기 전에 있던 구식 병원입니다. 이 허름한 병원 터에 새 병원을 짓는 데 드는 예산은 약 2천9백만 불로 추산되었습니다. 무톰보는 이를 위한 기금 중 첫 1500만 불을 자신의 개인 기부로 충당했습니다. 그것은 그때까지 무톰보가 벌어들인 연봉의 1/3에 육박하는 거액이었죠. 하지만 나머지 반을 채우는 데는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무톰보는 기금 마련을 위해 누구든 만났고 어디든 갔습니다. 처음 병원 설립을 결심한 1997년부터 2006년까지 무톰보가 기금 마련을 위해 이동한 거리는 무려 80만 5천 킬로미터에 이릅니다. 지구를 20바퀴나 돌 정도로 엄청난 거리죠. 오프시즌 동안 다른 선수들은 대부분 집에서 가족과 시간을 보내지만, 무톰보는 일주일에 2~3일은 기금 마련을 위해 밖에 나가있어야 했습니다. 무톰보 스스로가 ‘아내가 도망가지 않고 기다려줘서 정말 다행’이라고 할 정도였죠.
그는 시즌 중에도 다른 선수들이 아직 자고 있을 이른 아침에 일어나 기부자들을 만나는 일이 많았습니다. 시애틀에 원정을 가면 아침에 빌 게이츠 재단을 다녀오는 식이었는데, 어느 날인가는 빌 게이츠를 만나다 팀 연습에 늦어서 택시를 타고 시애틀 시내를 질주한 적도 있었죠.
물론 좌절도 여러 번 겪어야 했습니다. 1999년에 야심차게 추진한 첫 모금 바자는 4만9천 달러 적자라는 처참한 결과로 끝나기도 했죠. 하지만 이 노장 선수의 꺾이지 않는 의지는 리그의 모든 사람들을 감동시켰습니다. 휴스턴 팀메이트였던 쥬완 하워드는 10만 달러를 기부했고, 덕 노비츠키나 레안드로 발보사등 여러 선수들이 무톰보 재단에 모두 50만 달러를 기부했습니다. 휴스턴 구단에서는 연말 자선 바자회로 모금한 49만 달러를 모두 기부했고, 새크라멘토의 패트리 단장도 25만 달러를 기부하는 등 구단주 및 단장 모임에서도 지원을 약속했죠. 마침내 리그 사무국에서 공식적으로 지원을 선언했고, 재정적 지원과 함께 병원 설립 후 운영비 모금을 위해 ‘10만 기부자 모집’ 캠페인을 펼치기로 했습니다. 10만 명이 한 달에 10달러씩 1년 동안 1200만 달러를 모으자는 캠페인이죠. 이 캠페인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합니다.
무톰보의 어머니 이름을 딴 ‘비암바 마리 무톰보 병원’은 몇 번이나 개관을 연기하는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2007년 6월 17일, 아버지 사무엘을 모시고 개관식을 가졌습니다. 무톰보 일생의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죠.
“이 뜻 깊은 날, 사랑하는 저희 어머니, 비암바 마리 무톰보를 떠올려봅니다. 어머니는 제 인생 최고의 선생님이셨습니다. 죽음이 어머니를 데려가서, 어머니는 당신 두 눈으로 당신의 꿈이 이뤄진 이 모습을 보지 못하십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천국에서 웃음 지으며 우리들과 함께 기뻐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축사를 읽는 무톰보의 목소리가 탁했던 건 단지 그의 평소 목소리가 그랬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비암바 마리 무톰보 병원' 개관식 모습
같은 해 12월에 첫 환자를 받은 이 병원의 병실에는 ‘트레이시 맥그래디’나 ‘야오 밍’, ‘알론조 모닝’같은 동료들의 이름이 붙어있습니다. 아직 의사나 연구원, 각종 기자재가 많이 부족하지만, 무톰보의 열정이 살아있는 한 콩고와 아프리카 사람들의 삶에 반드시 큰 기여를 할 것입니다.
세월도 비켜간 '마운틴'
휴스턴에서 퇴물 선수로 은퇴할 것 같았던 무톰보가 다시 한 번 빛을 발한 것은 2006-07시즌이었습니다. 야오 밍이 부상으로 한동안 돌아오지 못한 것이죠. 절체절명의 위기해서 무톰보가 일어났습니다.
선발로 나선 첫 경기에서 18분 동안 5리바운드로 컨디션을 끌어올리기 시작한 무톰보는 두 번째 경기에서는 19분 동안 10리바운드를 잡아냈습니다. 그리고 14개, 11개, 12개...... 계속해서 두 자릿수 리바운드를 잡아낸 무톰보는 11경기 연속 두 자릿수 리바운드를 기록하는 노익장을 과시했죠.
1월 10일, 레이커스와 가진 홈경기에서 무톰보는 대기록을 세웠습니다. 스물한 살이나 어린 바이넘의 원핸드 덩크를 블록하며 NBA 통산 블록슛 2위에 오른 것이죠. 이 경기에서 무톰보는 무려 34분을 소화하며 7득점 19리바운드 5블록의 괴물 같은 활약을 펼쳐 팀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두 달 후 덴버와의 홈경기에서는 22리바운드를 잡아내며 40대 나이에 한경기 20리바운드 이상을 기록한 최초의 선수가 되기도 했습니다.
무톰보가 조국에 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팀에서도 최후의 희망 같은 존재였습니다. 비록 지난 시즌도 야오 밍이 시즌아웃 당하며 우승반지를 끼는 데 실패했지만, 무톰보는 그가 뛰고 있는 동안에 수비진의 최후의 보루로, 라커룸의 큰형님으로 그 역할을 다했습니다.
‘제게 농구는 끝났습니다.’
2008-2009 시즌, 미계약 상태로 시즌 개막을 맞은 무톰보는 몇 달 후 휴스턴과 계약했습니다. 이번 시즌이 정말로 마지막이라는 다짐과 함께 맞은 시즌이었습니다. 야오 밍의 백업으로 시즌 후반부터 9경기에 출장하며 플레이오프에 대비한 무톰보는 여전히 관록 있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플레이오프 첫 경기에서는 포틀랜드를 상대로 18분 동안 리바운드 9개, 블록슛 2개를 기록하며 노익장을 과시했습니다.
그리고 맞은 2차전, 야오 밍을 대신해서 1쿼터 종료 3분여 전 투입된 무톰보는 포틀랜드의 그렉 오든과 리바운드 볼을 다투고 있었습니다. 농구공을 처음 잡은 이래 수만 번이나 잡아내온 수비 리바운드 점프였습니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은 무톰보의 왼쪽 무릎이 이상한 방향으로 비틀렸고, 무톰보는 뛰어오르지 못한 채 코트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쓰러지는 와중에도 오든에게 파울을 해서 쉬운 득점을 주지는 않았습니다.
관중석에 갑자기 정적이 흘렀습니다. 휴스턴 벤치에 있던 선수들이 모조리 일어섰고, 수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무톰보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해설자들은 무톰보가 NBA에서 18년간 걸어온 길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코트에 쓰러져 무릎을 부여잡고 괴로워하는 무톰보에게 아주 나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경기장의 모든 사람들이 직감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빨리, 똑똑히 깨달은 것은 무톰보 자신이었습니다. 의료진이 달려오고 이동 침대가 운반돼 오는 동안, 43세를 맞은 노장 선수의 눈에서는 조용히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무톰보에게 내려진 판정은 ‘무릎 인대 손상’이었습니다. 무톰보는 그의 이번 시즌이 끝난 것을 의미하는 것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슬픈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아뇨, 내 커리어가 끝났습니다. 전 아마 수술을 받아야 할 겁니다. 일단 남은 플레이오프 경기에는 함께 할 것입니다. 후배들과 함께 하며 그들을 응원하고, 그들이 나에게 보여줬던 사랑에 보답할 것입니다. 하지만....... 내게 농구는 이제 끝났습니다.”
이동 침대에 실려 나가는 무톰보에게 로즈 가든의 관중들은 일제히 기립박수를 보냈습니다. 원정팀에게 가혹하기로 유명한 포틀랜드 홈구장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지난 18년 동안 무톰보가 보여준, 농구 이상의 그 무엇을 향한 박수였습니다.
다음날,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한 무톰보에게 리그 사무국은 리그 역사상 최초로 인도주의상 2회 수상의 영예를 선사했습니다.
킨샤사의 성자
무톰보는 1991년부터 18시즌동안 6개의 팀에서 1196경기를 출장, 평균 9.8득점과 10.3개의 리바운드, 2.8개의 블록슛을 기록했습니다. 그의 통산 블록슛 3289개는 역대 2위의 기록이며, 수비왕 4회와 디펜시브팀 6회, 리바운드왕 2회, 블록슛왕 3회로 수비수로써 위대한 업적을 남겼죠. 그가 코트 위에서 펼친 활약만으로도 우리가 그를 기억해야 할 이유는 충분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위대함은 경기장 밖에서 더 많이 찾을 수 있습니다. 그는 수많은 자선 활동을 통해 고통 받는 사람들을 도우려 애썼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능으로 인한 성공의 결과를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썼습니다.
“이건 살아오면서 얻은 지혜입니다. 모두가 삶의 목적이 있죠? 제 삶의 목적은 사회를 발전시키는 겁니다. 그냥 혼자서 좋은 사람으로 있는 게 아니라, 사람들의 생활에 기여하는 겁니다. 저는 제가 돌보는 사람들의 생명과 생활수준을 향상시키려 하고 있죠.
만약 사람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면, 그 사람들이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도 있겠죠. 제가 그들에게 원하는 것은 바로 그겁니다.“
2007년 1월 부시 미국 대통령은 신년 담화문 발표장에 무톰보를 초대했습니다. 그는 영부인 로라 부시의 옆에 앉은 무톰보를 가리키며 ‘이 콩고의 아들을 미국 시민이라 할 수 있어서 영광’이라고 말했죠.
그는 나이지리아에 컨설팅 회사를 차리고 아프리카에 새 집을 짓는 사업을 시작하려 하고 있습니다. 또한 ‘아프리카 채널‘ TV 방송국을 설립해서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한 홍보활동을 하고 있기도 하죠. 농구선수로써 경력은 끝났지만, 세계와 인류를 향한 무톰보의 발걸음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무톰보는 훗날 NBA 팬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을까요?
이런 모습일 수도 있고,
또는 이런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무톰보가 진정으로 기억되길 원하는 모습은 이런 것일 것 같군요.
무톰보가 살려낸 저 아이들 중에는 미래의 위대한 자선사업가, 아프리카의 현실을 개선할 위대한 정치인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혹은 저 중 위대한 NBA 선수가 나와서, 우리 아이들이 그를 보고 열광할 수도 있겠죠. 그럼 우리는 아이들에게 '바로 저 선수가 아버지 때의 위대한 수비수 무톰보가 키워낸 선수란다' 하고 말해줄 수도 있을 겁니다.
우리가 친구들에게 NBA를 자랑할 때 말할 수 있는 것이 많을 것입니다. 마이클 조던이라는 이름의 신이 하늘을 날아다녔고 매직과 버드의 전설이 만들어진 곳, 샤킬 오닐이라는 괴수가 바스켓을 습격하며 코비라는 불세출의 스타가 폭발하는 곳,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초인들이 최고의 경기를 펼치며 수많은 명장면이 만들어지는 곳..... 모두 좋은 얘깁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렇게도 말할 수 있겠죠.
"우리가 보고 있는 NBA는, 아프리카 어디 붙어있는지도 모르는 나라 출신의 비쩍 마른 소년에게 인류애를 실현할 기회를 줄 수 있는 리그다"
그리고 무톰보 역시 리그에게 옳은 일을 할 기회를 주었죠.
그는 자신의 생애를 통해 자신이 속한 무대에 더욱 특별한 가치를 부여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수많은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그의 신념과 열정은 주위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그의 위대한 여정에 동참하도록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NBA는 지나치게 상업화되었고 선수들은 돈만 밝힌다’는 비판을 들었을 때 조용히 무톰보를 가리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무톰보가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 명예의 전당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인지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게 하나 있죠.
언제 어디서든, 우리가 볼 수 있든 없든 무톰보는 인류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고 있을 것이며, 우리는 그를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디켐베 무톰보 재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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