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기적을 꿈꾸는 오스틴 카
이번 시즌 창단 이래 최고의 성적을 기록하고 있는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는 관심도와 상업적인 성공 면에서도 커다란 발전을 이루고 있다. 대부분의 홈경기가 매진사례를 이루고 있는 캐벌리어스는 평균 20,477명의 홈 관중 수를 기록, 이 추세대로라면 구단 역사상 한 시즌 최다 홈관중 기록을 경신하게 된다. 그들 중 27%는 클리블랜드가 속한 오하이오 주 밖에서 온 관중이다. 창단 40여 년 만에 드디어 전국적인 관심을 받는 팀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캐벌리어스에게 클리블랜드와 오하이오 주의 팬들이 보내는 성원은 훨씬 더 열광적이다. 2008년 오하이오 주의 케이블 TV 프로그램 중 가장 점유율이 높았던 프로그램은 폭스 스포츠 오하이오에서 방송하는 캐벌리어스의 경기였다. 8.2에 이르는 시청자 지수는 리그 평균보다 2.4배나 높으며, 13%의 점유율은 미국 최고 인기드라마인 ‘LOST'보다도 높은 수치다. 우리나라에 비유하자면 울산에서 울산 모비스의 농구경기 시청률이 ’아내의 유혹‘보다도 높은 것과 같다.
보다 많은 팬들이 캐벌리어스의 경기를 시청하게 되면서 클리블랜드 지역방송에서 캐벌리어스 경기 해설을 맡고 있는 오스틴 카(Austin Carr)의 인기도 함께 높아지고 있다. 재즈 가수를 연상시키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대놓고 편파방송을 하는 카는 자신만의 독특한 추임새로도 유명하다. 예를 들어 캐벌리어스 선수가 슬램덩크를 성공시키면 ‘Throws the hammer down(해머를 내리칩니다)!' 하고 소리친다. 블락을 하면 ’Get that weak stuff outta here(엉덩이 이리 대)!‘, 3점을 성공시키면 ‘Deep at the Q(퀴큰 론즈 아레나 깊숙한 곳에서 성공)!'이다. 르브론 제임스에게 ’L-Train'이라는 별명을 처음 붙인 것도 카다.
Cleveland Cavaliers announcer Austin Carr
카의 독특한 멘트는 오하이오 지역에 수많은 팬들을 만들어냈다. 심지어 클리블랜드에서는 ‘오스틴 카 술 마시기 게임’이라는 게임도 유행하고 있다. 친구들끼리 캐벌리어스 경기를 보면서 카가 특정 멘트를 할 때마다 술을 ‘원샷’ 하는 것이다. ‘Shoot Boobie, shoot!' 이란 멘트에는 두 잔, ’What in the world is going on!‘에는 넉 잔 하는 식이다. 경기 중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라디오 뉴스를 통해 그런 게임이 있다는 사실을 안 카는 팬들에게 새로운 즐거움을 준 것을 기뻐했다.
올해로 39년째 캐벌리어스와 인연을 맺고 있는 카는 클리블랜드를 대표하는 스포츠 스타다. 처음에는 선수로, 은퇴 후에는 구단 홍보 담당자와 TV 해설자로, 또한 지역사회사업가로, 카는 언제나 클리블랜드 시민들과 함께 해왔다. 한 세대가 넘는 오랜 시간 동안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카와 클리블랜드 시민들이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추억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농구 최고의 득점기계
오스틴 카는 1948년 3월 10일, 국방성 자재부 직원인 아버지와 간호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카의 부모님은 다섯 자녀를 엄격한 가톨릭 방식으로 키웠고, 카는 주위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는 예의바른 아이로 자랐다. 부모님의 직장이 있던 워싱턴 D.C.에서 소년시절을 보낸 카는 그리 크지 않은 키에도 불구하고 민첩한 몸놀림과 정교한 슈팅으로 고교 농구계를 주름잡았다. 고등학교 마지막 학년에 아티스 길모어 등과 함께 All-America에 선정된 카는 체육 특기자로 대학에 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카의 아버지는 집에 밀려든 수많은 대학홍보물 중에서 노트르담 대학과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을 놓고 고민했다. 그는 자신의 능력에도 불구하고 학력 부족 때문에 번번이 승진 인사에서 탈락했던 아픔을 가지고 있었다. 아들에게는 똑같은 아픔을 맛보게 하고 싶지 않았던 그는 아들을 엄격한 가톨릭 학풍을 지닌 노트르담 대학으로 진학시키기로 했다.
카는 아버지의 바람과는 달리 첫 학기에 신통찮은 성적에 그쳤다. 처음으로 가족과 멀리 떨어져서 생활하게 된 데다 모든 것을 혼자서 계획해야 하는 대학 생활에도 적응하지 못했던 것이다. 곤경에 빠진 카에게 손을 내민 것은 교수들이었다. 교수들은 카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했을 뿐 학습능력도 의지도 부족하지 않은 학생이라는 것을 알고 카가 공부에 집중할 수 있도록 여러 모로 배려해줬다. 마음을 다잡은 카는 점점 성적을 올리기 시작했고, 경제학사 학위를 받은 졸업학기에는 우등생 명단에까지 들었다.
카는 대학농구에도 순조롭게 적응했다. 당시에는 1학년이 경기에 뛸 수 없었기 때문에 카의 NCAA 데뷔는 2학년에 이루어졌는데, 이때부터 3년 동안 카는 장거리 슈터임에도 불구하고 60%의 야투율로 경기당 34.5점을 올리는 최고의 대학 스타로 성장했다. 신장은 193cm로 그렇게 크지 않았지만 이를 상쇄할 만한 민첩성을 가지고 있었고, 오늘날의 3점슛 라인보다 훨씬 먼 곳에서 마치 레이업을 넣듯이 꽂아넣는 폭발적인 장거리 슛은 카를 막을 수 없는 득점기계로 만들어 주었다. 카는 3학년과 4학년 시즌에 각기 1,000득점 이상을 올렸는데, 그때까지 한 시즌에 1,000득점을 올린 대학선수는 피트 마라비치 뿐이었다.
카의 득점력은 플레이오프 같은 중요한 경기에서 더 빛을 발했다. 1970년 NCAA 토너먼트에서 카는 오하이오 대학을 상대로 무려 61점을 몰아넣었는데, 이는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NCAA 토너먼트 한 경기 득점 기록이다. 카는 이날 경기에서 한 경기 최다 야투성공(25개) 및 야투시도(44개)를 기록했으며, 카가 NCAA 토너먼트 7경기에서 기록한 평균 50득점은 앞으로도 깨지기 힘든 불멸의 기록으로 남아있다.
“저도 그 경기를 다시 보고 싶은데 경기 영상을 구할 수가 없군요. (그 경기를 중계한) CBS 방송국 여러분, 경기 영상이 남아있으면 보내주시겠습니까? 우리 아이들에게 제 한창때 모습을 보여주고 싶군요(웃음).”
1971년 올해의 대학 선수상을 수상한 카는 대학 시절 통산 2,560득점으로 역대 통산득점 5위의 성적을 남겼고, 훗날 대학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이제 남은 것은 NBA 도전 뿐이었다. 대학 농구 영웅 카는 1971년 드래프트에서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에게 1순위로 지명되며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신생팀의 희망, 그리고 부상
클리블랜드는 카가 지명되기 1년 전 리그에 가입한 신생팀이었다. 당시 클리블랜드 시는 파산상태였고, 클리블랜드의 젊은이는 일자리를 찾아 뿔뿔이 흩어지고 있었다. 클리블랜드 출신 사업가이며 MLB 구단인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소유주기도 했던 닉 말리에티는 스포츠를 통해 시민들의 자긍심을 높이려 했고, 마침 NBA에서 팀을 늘리려고 한다는 소식을 접하자 곧바로 유치 신청을 했다.
팀 유치 목적이 클리블랜드 시민 단합이었기 때문에, 클리블랜드의 신생팀은 처음부터 철저하게 지역 사회와의 유대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말리에티는 신생팀 이름을 시민 공모로 결정하기로 했고, 14,000여 개의 응모작 중 기병대(Cavaliers)를 신생팀의 이름으로 정했다. 개척시대에 인디언과 미국 기병대가 클리블랜드 지역에서 사투를 벌였던 역사에 착안한 것이었다. 유니폼 색깔도 클리블랜드에 위치한 말리에티의 모교인 존 애덤스 고등학교 유니폼의 색깔을 그대로 정했다. 오늘날 캐벌리어스의 별칭이자 특별한 경기에 입고 나오는 '와인 앤드 골드‘ 유니폼이다. 말리에티는 자신의 모교인 보울링 그린 대학교 농구 코치였던 빌 피치를 단장겸 감독으로 영입하면서 ’시민 친화형 구단‘ 구성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말리에티의 기대와는 달리, 혹은 예상대로, 신생팀 캐벌리어스의 시작은 처참했다. 1970-71시즌, 캐벌리어스는 15승 67패의 성적으로 리그 꼴찌를 기록했다. 함께 창단된 버펄로 브레이브스보다도 7승이나 뒤진 성적이었다. 관중 동원도 뒤에서 두 번째였다.
하지만 모든 일이 나쁘기만 할 수는 없는 법. 최악의 성적은 최고의 신인지명순위로 연결됐고, 캐벌리어스는 1971년 1순위 지명권을 획득하게 됐다. 오스틴 카는 바로 이 1순위 지명권으로 구단의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프로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카의 프로 생활은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카는 프리 시즌에 다리가 부러지며 데뷔전을 미뤄야 했다. 한 달 후에 복귀했지만 이번에는 반대쪽 발을 다쳐 또다시 7주간 치료를 받아야 했다. 결국 첫 시즌을 제대로 치르게 된 것은 시즌이 반 가까이 지난 후였다. 카의 선수경력 내내 발목을 잡았으며, 이후 캐벌리어스 출신 선수들에게 지긋지긋하게 따라붙게 되는 부상의 시작이었다.
일단 뛰기 시작하자 카의 득점력은 금세 두각을 나타냈다. 부치 비어드와 함께 백코트를 이룬 카는 43경기를 소화하며 팀 내 최다인 경기당 21.2득점을 올렸다. 출장경기 수 부족으로 포틀랜드의 시드니 윅스에게 신인왕을 넘겨줬지만 올 루키 퍼스트 팀에 들기에는 충분한 성적이었다.
이듬해인 1972-1973시즌 캐벌리어스는 비어드를 시애틀로 보내고 베테랑 민완가드인 레니 윌킨스를 영입했다. 훗날 캐벌리어스와 드림팀 III의 감독을 역임하며 명예의 전당에 오른 윌킨스는 당시 35세의 노장이었지만 올스타에 8번이나 오른 적이 있는 명가드였다. 카와 윌킨스는 멋진 조화를 이루며 40.1점과 11.8어시스트를 합작했고, 팀 성적도 3년 연속 상승세를 보였다. 카는 윌킨스를 보면서 득점을 하지 않고도 팀에 공헌할 수 있는 방법을 배워나갔다. 이듬해 노쇠 기미를 보인 윌킨스 대신 팀을 이끌게 된 카는 커리어 최다인 21.9점과 3.6리바운드, 3.8어시스트를 올리며 마침내 올스타에 선정됐다.
1974-1975시즌을 앞둔 캐벌리어스는 어느 때보다도 기대에 들떠있었다. 카와 포워드 빙고 스미스가 네 시즌째 호흡을 맞추며 탄탄한 기반을 이루고 있었고, 윌킨스가 팀을 떠났지만 짐 클레몬스가 훌륭히 포인트가드 자리를 이었기 때문이다. 캐벌리어스는 또한 ABA 파산 드래프트로 센터 짐 쵼스를, 트레이드로 베테랑 스윙맨 딕 스나이더를, 드래프트로 캠피 러셀과 푸츠 워커를 영입하는 등 알찬 전력보강을 했다. 홈구장도 최신 시설을 갖춘 리치필드 콜로세움으로 옮겼다. 캐벌리어스는 시즌 첫 경기를 4차 연장 끝에 분패하는 등 3연패로 시즌을 시작했지만, 이후 연승 가도를 달리며 팀 역사상 처음으로 5할 이상의 승률을 올리고 있었다.
불행이 닥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캔사스 시티와의 홈경기에서 카가 치명적인 무릎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대수술을 받은 카는 시즌 막판 복귀했지만, 이미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폭발적인 운동능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뒤였다. 나머지 선수들이 분전한 캐벌리어스는 휴스턴 로케츠와 마지막까지 플레이오프 진출을 놓고 경합을 벌였지만,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단 한 점 차이로 분패, 역시 단 한 경기 차이로 창단 이후 첫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카 개인에게는 참담한 한 해였지만 캐벌리어스에게는 가능성을 보인 한 해였다. 창단 이후 줄곧 팀을 이끌어온 빌 피치 감독은 모든 선수들이 공격과 수비에 참가하는 농구를 추구했고, 피치 감독의 이러한 철학은 지난 5년간 팀에 완전히 녹아들었다. 대부분 젊은 선수들로 이루어진 로스터에는 다재다능한 선수들이 많았고, 피치 감독이 단장까지 맡고 있던 프런트 역시 전력강화를 위한 노력을 그치지 않았다.
구단주 말리에티 역시 캐벌리어스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스포츠를 통해 ‘파산 도시’ 클리블랜드의 자긍심을 높이고자 노력한 말리에티의 꾸준한 노력은 1974년 리치필드 콜로세움 완공으로 그 결실을 보았다. 이전 시즌까지 홈 구장이었던 클리블랜드 아레나는 관중석이 8,000여 석에 불과한 낡은 경기장이었다. 이런 구장에서는 관중을 모을 수 없겠다고 생각한 말리에티는 클리블랜드 외곽 20여 킬로미터에 있는 부지를 매입해 다목적 대형 구장을 짓기 시작했다. 농구장 기준 20,273석의 관중석을 보유한 리치필드 콜로세움은 농구뿐 아니라 아이스하키, 콘서트 등 여러 목적으로 쓰일 수 있었으며, 귀빈석을 도입한 최초의 실내 경기장이기도 했다.
말리에티는 새 구장을 홍보하기 위해 처음부터 큰 이벤트를 많이 개최했다. 개관식을 겸해 프랭크 시내트라 콘서트를 유치했고, 이듬해 당대 최고의 복서 무하마드 알리와 애송이 척 웨프너간에 펼쳐진 대혈전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무명 배우였던 실베스터 스텔론은 TV로 이 경기를 시청한 후 영감을 얻어 ‘록키’의 대본을 썼고, 자신이 직접 주연을 맡으며 스타덤에 오르기도 했다.
캐벌리어스 역시 새 경기장에서 새로운 모습을 보이며 점점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이전 시즌까지는 8,000석 작은 경기장의 반도 채우기 힘들었지만, 리치필드 콜로세움에서 치른 첫 시즌에는 그 두 배의 관중을 모았다. 팀 전체가 활력에 차있었고, 누구나 다음 시즌을 기대했다.
마지막 퍼즐 조각 써몬드
기대와는 달리 캐벌리어스의 1975-1976시즌 초반은 그리 좋지 못했다. 공수 모두 안정적인 경기를 하는데도 번번이 2%가 부족한 모습을 보이며 6승 11패에 그쳤다. 그 이유를 쵼스 혼자서 맡고 있던 빅맨진의 부족에서 찾은 피치 감독은 트레이드로 훗날 명예의 전당에 오르게 되는 네이트 써몬드를 영입했다. 리치필드 콜로세움에서 불과 30여 킬로미터 떨어진 애크런에서 태어난 써몬드는 당시 34세로 오랜 시간을 뛰지 못하는 노장이었지만, 바로 전 시즌 리그 역사상 최초로 쿼트러플 더블을 기록할 정도로 능력 있는 선수였다. 피치 감독은 선발로 쵼스를 30분 가량 기용하면서 나머지 18분을 써몬드가 책임져주길 기대했다.
써몬드는 피치 감독의 기대에 잘 부응했다. 아니, 기대를 훨씬 뛰어넘었다. 써몬드는 캐벌리어스 센터진의 18분을 책임졌을 뿐만 아니라 라커룸에서 최고의 리더 역할을 해냈다.
카의 회상에 따르면, 처음 팀에 합류한 써몬드는 라커룸에 들어서자마자 후배들을 모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너희들은 너희들이 얼마나 뛰어난 선수들인지 모르고 있어. 이제 힘을 모아 뛰기만 하면 돼. 내가 앞으로 우승을 위해 뛸 수 있는 시간은 1,2년에 불과하겠지만, 여기서는 우승할 수 있을 것 같아.”
캐벌리어스 선수들은 산전수전 다 겪은 대선배의 격려에 큰 자신감을 얻었고 서로를 믿기 시작했다. 그리고 코트 위에서 그러한 믿음을 남김없이 표출했다. 캐벌리어스는 이후 승리를 거듭하며 전반기를 21승 20패로 마쳤다. 후반기로 접어들자 캐벌리어스의 상승세는 최고조에 달했다. 캐벌리어스는 후반기에만 28승 13패를 거두며 리그 최고 성적을 올렸고, 49승 33패의 성적으로 창단 이후 첫 디비전 우승을 차지했다.
1975-1976시즌의 캐벌리어스는 팀 플레이의 극한을 보여줬다. 최다득점자인 쵼스의 평균득점이 15.8점에 불과했지만, 그해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한 피치 감독이 주로 기용한 9명중 7명이 두 자릿수 득점을 올린 것이다. 모든 선수들이 팀을 위해 개인을 희생했다. 슈팅 갯수나 득점, 출장시간 등에 대해 불평하는 선수는 아무도 없었다. 카도 팀을 위해 식스맨 자리를 자청, 생애 최저인 경기당 19.7분 출장과 10.1득점에 그쳤지만, 중요한 순간마다 벤치에서 나와서 득점을 성공시켰다.
캐벌리어스 선수들의 동료애는 코트 밖에서 더 잘 나타났다. 선수들은 경기가 끝난 후에도 항상 함께 다녔다. 피치 감독이 쉬는 날 선수들을 소집할 일이 있으면 전화를 한 통만 걸면 될 정도였다. 어차피 전화 거는 곳에 전원이 모여있었기 때문이다.
캐벌리어스의 선전은 클리블랜드를 비롯한 오하이오주 북동부 주민들의 폭발적인 지지를 얻어냈다. 평균 관중 수는 지난해에 비해 또다시 50% 증가한 12,000여 명을 기록했고, 팬들은 클리블랜드의 새로운 자랑거리로 캐벌리어스를 꼽기 시작했다. MLB의 대표적인 약체 팀인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나 최악의 성적을 내고 있던 NFL팀 클리블랜드 브라운스 대신 캐벌리어스가 클리블랜드를 상징하기 시작한 것이다. 젊은이들의 캐벌리어스에 대한 사랑은 광적이었다. 암울한 지역 경제 때문에 방황하던 그들은 ‘젊은 캐벌리어스‘의 선전에서 자신들의 희망을 발견한 것이다.
열정적인 구단주와 우수한 감독, 팀워크로 똘똘 뭉친 선수들, 그리고 열광적인 팬들까지. '기적'을 위한 모든 요소가 갖춰졌다.
'리치필드의 기적'
창단 후 처음으로 플레이오프 무대를 밟은 캐벌리어스가 1라운드에서 마주친 상대는 워싱턴 불리츠였다. 그해에는 비록 48승에 그쳤지만, 불리츠는 바로 전 시즌만 해도 60승을 올리며 파이널에 올랐던 강팀이었다. 윌트 체임벌린과 함께 신인왕과 MVP를 동시 수상한 유이한 선수인 웨스 언셀드를 중심으로, 훗날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 엘빈 헤이스와 데이브 빙이 언셀드를 보조하고 있었다. 정규시즌 성적은 캐벌리어스가 앞섰지만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워싱턴의 승리를 점쳤다.
하지만 캐벌리어스의 팬들은 생각이 달랐다. 리치필드 콜로세움에서 벌어진 1차전은 19,974명의 관중이 몰리며 플레이오프 관중동원 신기록을 세웠다. 비록 캐벌리어스가 95-100으로 분패하긴 했지만, 팬들은 클리블랜드의 자랑에게 아낌없는 성원을 보냈다. 캐벌리어스도 팬들의 성원에 화답하듯 2차전에서 짜릿한 역전승을 거뒀다. 워싱턴에서 벌어진 2차전에서 캐벌리어스는 종료 6초전까지 79-78로 뒤졌으나 종료 직전 터진 빙고 스미스의 장거리 슛으로 한 점차 승리를 거뒀다. 스미스의 슛이 림을 가를 때 오늘날까지도 캐벌리어스의 라디오 중계 캐스터로 일하고 있는 조 타이트는 ‘빙고!’라고 소리쳤다. 본명이 로버트인 스미스에게 ‘빙고’라는 별칭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기세를 탄 캐벌리어스는 홈에서 펼쳐진 3차전에서도 낙승을 거뒀으나 4차전 원정에서 패하며 시리즈 전적 2-2 동률을 이뤘다.
클리블랜드에서 열린 5차전도 마지막까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명승부였다. 캐벌리어스는 종료 7초전까지 90-91로 뒤진데다 엘빈 헤이스에게 자유투까지 내줬지만, 헤이스는 클리블랜드 관중들의 필사적인 방해공작(?) 때문인지 두 개의 자유투를 모두 실패했다. 캐벌리어스는 타임아웃 후 시도한 공격에서 2차전의 영웅 스미스가 에어볼을 던졌으나 베이스라인을 파고든 짐 클레몬스가 천금같은 공격리바운드를 잡아낸 후 버저비터 리버스 레이업까지 성공시켰다. 92-91, 캐벌리어스의 승리였다.
워싱턴도 홈에서 열린 6차전을 연장 끝에 잡아내 시리즈 전적 3-3. 양팀 모두 벼랑 끝에 선 가운데 운명의 7차전이 다가왔다.
4월 29일, 리치필드 콜로세움에서 열린 7차전을 앞두고 클리블랜드의 팬들은 캐벌리어스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기로 한 것처럼 보였다. 카는 그날의 열정적인 성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경기 시작이 두 시간이나 남았는데도 수천 명의 팬들이 이미 입장해 있었어요. 그리고 두 시간 내내 연습하는 우리들에게 ‘우리는 캐브스를 원한다’며 응원을 보내줬죠. 저는 클리블랜드에서 40년 가까이 살고 있지만 그런 열정적인 응원은 본 적이 없습니다.”
경기 시작이 다가옴에 따라 관중들은 계속해서 몰려들었다. 표를 구하지 못한 팬들도 어떻게든 입장하려고 갖가지 방법을 동원했다. 구단 직원들이 제지해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고, 결국 20,273석의 수용인원을 훨씬 넘는 관중들이 통로를 꽉 채운 채 열광적인 응원을 보냈다. 오하이오 북동부의 주민들이 모두 모인 것 같았다. 공식적으로는 그날의 관중 수가 새로운 플레이오프 관중 기록인 21,564명으로 기록되긴 했지만, 실제로 몇 명이 들어왔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들이 외치는 응원의 함성이 어찌나 컸던지, 네이트 써몬드는 그날 녹음한 응원소리를 평생 지니고 다니며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마다 듣곤 한다.
경기는 시종일관 접전 양상을 보였고, 팬들은 점점 더 큰 목소리로 ‘Let's Go Cavs!!!'를 외치기 시작했다. 오늘날 캐벌리어스의 홈구장에서 울려퍼지곤 하는 구호가 바로 이때 탄생했다. 종료 1분 30초 전 85-83으로 앞서고 있던 캐벌리어스는 헤이즈가 5차전에 이어 또다시 자유투 두 개를 모두 실패하며 승기를 잡는 듯 했지만, 9초를 남기고 워싱턴의 필 체니어에게 점프슛을 얻어맞아 동점을 허용했다. 시리즈를 승리하기 위해서는 남은 9초 동안 반드시 득점을 성공시켜야 했다. 타임아웃을 부른 피치 감독은 슈터인 딕 스나이더에게 마지막 공격을 맡겼다. 단, 점프슛이 아니라 드라이브인 공격을 주문했다. 워싱턴 수비진의 의표를 찌르기 위해서였다.
모든 것이 걸린 마지막 공격, 사이드라인에서 클레몬스에게 인바운드 패스를 건네받은 스나이더는 슛을 막으러 나온 언셀드를 제치고 페인트존으로 파고들었다. 스나이더가 4초를 넘기고 던진 한 손 플로터는 백보드를 한 번 맞추고 림으로 빨려들어갔다. 캐벌리어스가 87-85로 앞서는 순간이었다. 워싱턴은 마지막 공격에서 언셀드가 골밑으로 롱패스를 시도했으나 스나이더에게 걸렸고, 체니어가 던진 마지막 슛도 림을 외면했다. 경기를 중계하던 조 타이트가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캐벌리어스 승리! 캐벌리어스 승리!” 플레이오프에 첫 진출한 캐벌리어스가 강호 워싱턴에게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는 순간이었다.
승리가 확정되는 순간 리치필드 콜로세움을 가득 메운 관중들이 코트로 쏟아져들어왔다. 그들은 기쁨의 함성을 지르며 선수들을 끌어안았다. 이미 선수도 관중도 없었다. 놀라운 일체감을 보여주며 서로를 위해 헌신한 기적의 주인공들이 있을 뿐이었다. NBA 역사에 ‘리치필드의 기적’이라 기록되는 캐벌리어스 역사상 최고의 순간이었다.
'리치필드의 기적'
카는 그날의 감격을 떠올리며 지그시 눈을 감는다.
“팬들이 우리가 지는 걸 허락하지 않았어요. 그날 우리가 치른 경기를 기적이라고들 하는데, 진짜 기적은 그날 경기장에 있었던 팬 여러분들입니다. 그런 응원을 받으면 누구든지 힘을 낼 수밖에 없을 겁니다.”
기세가 하늘 끝가지 오른 캐벌리어스는 컨퍼런스 파이널 상대인 보스턴을 맞아 전의를 다지고 있었다. 하지만 크나큰 불행이 캐벌리어스를 덮쳤다. 보스턴과의 1차전을 이틀 앞두고 가진 훈련시간에 주전 센터인 쵼스가 러셀의 발을 잘못 밟으며 발목이 부러진 것이다. 캐벌리어스에게는 너무나 큰 손실이었다. 존 하블리첵과 데이브 코웬스가 이끄는 보스턴에게 쵼스 없이 이기기는 너무나 힘들었다.
캐벌리어스는 보스턴에서 펼쳐진 1,2차전을 예상대로 모두 내줬다. 하지만 기적의 여운은 아직 남아있었다. 클리블랜드에서 펼쳐진 3,4차전에서는 또다시 플레이오프 관중 신기록이 세워졌고, 캐벌리어스는 홈 팬들의 열광적인 응원에 힘입어 3,4차전에서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주전 센터 없이 상대하기에는 보스턴의 골밑이 너무 높았다. 신장의 열세 때문에 시리즈를 계속할수록 체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결국 써몬드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5,6차전을 모두 내준 캐벌리어스는 파이널 진출 일보직전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파이널에서 만날 수도 있었던 피닉스에게는 시즌 전적 3-1로 앞서있었기 때문에 아쉬움이 더했다.
비록 파이널에 진출하지 못하고 보스턴의 우승을 지켜봐야 했지만, 캐벌리어스는 우승보다 값진 것을 얻었다. 창단 6년 만에 클리블랜드의 일부로 자리잡은 것이다. 스포츠를 통해 클리블랜드 시민들의 자긍심을 높이려던 말리에티 구단주의 꿈이 마침내 이루어졌다.
1975-1976시즌 '기적의 팀' 캐벌리어스.
아래 왼쪽에서 두 번째가 카
부상, 그리고 은퇴
기적은 한 번만 일어나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일까? 캐벌리어스는 이듬해에도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으나 1라운드에서 복수의 칼을 갈고 있던 워싱턴에게 탈락했고 이듬해에도 뉴욕에게 2전 전패로 탈락하는 등 1라운드의 벽을 넘지 못했다. 팀의 구심점이었던 맏형 써몬드는 은퇴했고 캐벌리어스는 더 이상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하는 팀이 되었다. 카는 세 시즌 연속 전경기를 출장했지만 팀의 몰락을 막지 못했다. 결국 1978-1979시즌 30승 52패에 그친 피치 감독이 물러났고, 이듬해에는 팀 자체가 팔렸다. 캐벌리어스에 긴 암흑기가 다가온 것이다. 이후 6년 동안 캐벌리어스는 세 명의 구단주와 아홉 명의 감독이 바뀌어야 했다. 연고지 이전 파동을 두 번이나 겪으며 버림받을 뻔한 팬들도 등을 돌렸다. 한때 만원사례를 이뤘던 리치필드 콜로세움에는 정원의 1/4도 안 되는 관중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캐벌리어스의 암흑기는 1986년 고든 군드가 팀을 인수한 뒤 과거 캐벌리어스 선수였던 레니 윌킨스를 감독으로 앉히고 브래드 도허티와 마크 프라이스를 영입한 뒤에야 끝나게 된다.
어느덧 30대에 접어든 카의 선수인생에도 마지막이 다가왔다. 무릎에 또다시 치명적인 부상을 당한 카는 선수인생 세 번째로 대수술을 받아야 했다. 의사는 카가 두 발로 설 수 있을 것이란 말 외에는 어떤 긍정적인 약속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카는 포기하지 않았다. 재활치료가 끝난 뒤에도 매일 18kg의 기구를 발에 묶고 들어올리는 훈련을 반복했다. 결국 카는 기적적으로 돌아와 코트 위에서 은퇴할 수 있었다. 비록 그 사이에 댈러스를 거쳐 워싱턴으로 트레이드되는 바람에 정든 홈코트에서 은퇴할 수는 없었지만, 카의 초인적인 재활노력과 감동적인 복귀는 리그의 후배들에게 큰 감동을 줬다.
카는 NBA에서 10시즌간 뛰며 평균 15.4득점 2.9리바운드 2.8어시스트를 기록했다. 대학 시절 받았던 기대에는 한참 미치지 못한 성적이었지만, 캐벌리어스가 클리블랜드 시민들의 마음속에 정착한 첫 10년을 상징하기에는 충분했다. 캐벌리어스는 카가 마지막 시즌을 끝내기도 전인 1981년 1월 카의 34번 저지를 영구결번시켰다. 카와 영광의 시절을 함께 했던 빙고 스미스와 네이트 써몬드도 캐벌리어스 역사상 단 6명뿐인 영구결번의 영예를 안았다. 오늘날까지도 캐벌리어스 통산 출장경기 5위, 득점 3위, 야투시도 및 성공 1위, 어시스트 8위 등에 올라있는 카는 1999년 클리블랜드 팬들이 뽑은 올타임 캐벌리어스 베스트 5에 선정되기도 했다.
제2의 고향에서 새 인생을 시작하다
비록 선수로써의 인연은 끝났어도 카와 클리블랜드의 인연은 끝나지 않았다. 선수시절부터 클리블랜드에서 사회사업에 헌신해 1980년 NBA가 지역사회에 공헌한 선수에게 주는 ‘월터 케네디 스포츠맨십 상’을 수상하기도 한 카는 은퇴 후에 클리블랜드로 돌아와 제2의 고향과의 인연을 이어갔다. 카는 클리블랜드 아동들을 상대로 농구 교실을 열어 팀플레이 중심의 교육을 했다. 카는 오늘날 사회가 각박해져가고 있는 이유가 어릴 때부터 자신만이 특별하다고 생각하며 자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저는 한때 전국 최고의 대학 선수였지만 저 혼자 특별대우를 받거나 연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재능은 신이 주셨지만 그 재능을 연마해 사용하는 것은 우리 인간이죠. 어렸을 때부터 ‘나는 노력할 필요가 없어’라고 생각하며 자라게 되면 어른이 돼서도 그런 태도를 지니고 살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태도는 함께 살아가야 하는 세상에서는 용납될 수 없죠.”
카는 이런 교육방침을 자신의 가정에도 그대로 적용시켰다. 클리블랜드에서 결혼한 아내 샤론과의 사이에 1남1녀를 두고 있는 카는 자녀들에게 남을 위해 헌신하는 자세를 가르쳤고, 클리블랜드에서 줄곧 자라난 카의 자녀들은 모두 지역 사회를 위해 여러 가지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카가 클리블랜드에서 펼쳐온 사회사업에는 때때로 ‘기적의 해’ 동료들이 함께하기도 한다. 캐벌리어스에는 은퇴 선수들과 전임 구단주가 참석한 가운데 자선 골프대회를 여는 전통이 있다. 카가 은퇴한 후 구단주가 여러 번 바뀌었지만, 댄 길버트 현 구단주를 비롯한 역대 구단주들은 이 전통을 30여 년째 지켜오고 있다. 골프대회에는 핸디 6의 ‘명 골퍼’ 카를 비롯해 말리에티 전 구단주, 빌 피치 전 감독, 빙고 스미스, 네이트 써몬드 등 캐벌리어스의 여명기를 함께 한 전우들이 자리를 빛낸다. 노장들의 대화는 항상 ‘기적의 해’로 거슬러 올라간다. ‘만약 보스턴과의 컨퍼런스 파이널을 앞두고 쵼스의 다리가 부러지지 않았더라면‘ 하는 가정 말이다. 노장들은 한껏 기세를 올린다. “쵼스만 있었으면 우리가 최고였다고!”
기사단의 심장
카가 클리블랜드에서 펼친 여러 사회사업은 클리블랜드 시민과 카 사이에 굳건한 유대감을 형성했다. 시민들은 카와 함께하며 어려웠던 시절 클리블랜드에 희망을 줬던 ‘기적의 해’를 떠올린다. 그로부터 30여 년, 이제 기적이 이루어졌던 리치필드 콜로세움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캐벌리어스는 1994년 새 구장인 군드 아레나(현 퀴큰 론즈 아레나)로 홈구장을 옮겼고, 사명을 다 한 리치필드 콜로세움은 1999년 클리블랜드 시민의 애도 속에 철거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그들이 함께한 추억은 와인 & 골드 옛 유니폼을 입은 리그의 새로운 아이콘이 코트를 질주하고 있는 오늘날에도 세대를 건너 이어져오고 있다. 카가 퀴큰 론즈 아레나의 중계석에 앉으면 캐벌리어스 팬들은 따뜻한 박수를 보낸다. ‘기적의 해’를 함께 한 올드팬도, 카의 농구 교실에서 농구를 배운 젊은 팬도 말이다. 팬들은 카 뿐 아니라 클리블랜드 지역방송국에서 하프타임 리포트를 진행하는 캠피 러셀이나 경기 후 라디오 분석을 하는 짐 쵼스에게도 갈채를 보낸다. 캐벌리어스가 어려운 일을 겪었을 때나 큰 도전을 만났을 때, ‘리치필드의 기적’은 선수와 팬 모두의 마음속에서 등불처럼 빛나곤 했다.
‘기적의 해’ 이후 처음으로 센트럴 디비전 왕좌를 눈앞에 두고 있는 오늘날의 캐벌리어스를 카는 어떻게 생각할까?
“무엇보다 선수들의 자부심과 의지가 대단합니다. 모든 스포츠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죠.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선수들이 잘 어울리고 있습니다. 라커룸 분위기도 최고고요. 마치 ‘기적의 해’ 시절같은 분위기입니다. 이런 팀은 언제든 이길 기회를 갖게 됩니다.”
오스틴 카는 스포츠가 스포츠를 넘어 지역 사회에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 그의 생애를 통해 대답했다. 그는 캐벌리어스의 여명기를 상징하는 선수였을 뿐 아니라 클리블랜드 시민이 어려운 시절에도 잃지 않았던 용기와 희망의 상징이기도 했다.
캐벌리어스 후배들이 마침내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날, 카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캐벌리어스와 함께 할 것이다. 자신과 동료들이 못다 이룬 기적이 이뤄진 현장에서 카만의 푸근한 목소리로 소리칠 것이다.
“Yes! Young men, Boom Boom.... It's G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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