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 & COLUMNS/허슬플레이어

클리퍼스, 그 험난했던 항해일지 제 2장 - 샌디에이고에서 L.A로 향하는 어둠의 항해

알 수 없는 사용자 2008. 12. 31. 12:54


새 구단주 어브 레빈(Irv Levin)의 열망으로 인해 연고지를 수천마일 떨어진 샌디에이고(San Diego)로 옮긴 버팔로 브레이브스(Buffalo Braves)는 "샌디에이고 클리퍼스(San Diego Clippers - Clippers는 '쾌속선'을 가리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출항을 앞두게 되었다.

캘리포니아 주에 위치한 샌디에이고는 60년대 말에는 로케츠(Rockets)라는 구단의 연고지였다. 1967년에 탄생한 "샌디에이고 로케츠"는 성적이 그다지 신통치 못했고, 이로 인해 흥행 부진에 허덕이다가 결국 71년 휴스턴으로 연고지를 이전하며 지금의 "휴스턴 로케츠"가 되었다.

로케츠가 발사 된 뒤 잠시 쓸쓸했던 이 도시에 8년만에 새로운 NBA 팀이 항구로 찾아오게 된 것이다.

'클리퍼스 호'의 첫 항해는 비교적 순탄한 편이었다. 연고지를 바꾸고 처음 맞은 78-79시즌, 비교적 어수선한 팀 분위기에서도 새 감독 진 슈(Gene Shue)는 팀을 그럭저럭 잘 이끌며 5할 이상의 호성적(43승 39패)을 기록했다. 

비록 안타깝게 두 경기 차로 6개팀에게만 주어지던 플레이오프 티켓을 따내는 데는 실패했지만, 버팔로 시절의 전 시즌보다 16승이나 향상된 제법 괜찮은 성과였다.

클리퍼스 호의 첫 일등항해사는 바로 월드 B. 프리(World B. Free)라는 4차원의 이름을 가진 선수였다. 필라델피아 76ers에서 뛰다가 오프시즌에 트레이드되어 클리퍼스에 합류한 프리는 무려 평균 28.8 득점을 올리며 조지 거빈(George Gervin)에 이어 리그 득점 2위에 올랐다.

프리는 그의 이름만큼이나 참 독특한 선수였다. 본명은 로이드 버나드 프리(Lloyd Bernard Free)였는데 일찍부터 뉴욕 길거리에서 그 이름을 날렸고, 그의 화려한 플레이에 반한 길거리의 팬들은 그에게 '월드(World)'란 별명을 붙어주었다. '세계 최고'라는 이 별명이 무척 맘에 들었는지 로이드 프리는 '월드'를 아예 자신의 본명처럼 사용했다.

프리는 필라델피아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는데, 당시 팀에는 쥴리어스 어빙(Julius Erving), 조지 매기니스(George McGinnis)같은 대선배들이 있었기에 그의 이름대로 자유로운 플레이를 펼치지는 못했다. 필라델피아 시절 그의 평균 득점은 15점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클리퍼스로 오자 상황이 달라졌다. 프리는 필리 시절 펼치지 못한 그야말로 프리-스타일(Free-style)의 농구를 맘껏 선보이며 팀을 들었다 놨다 했다. 그의 현란한 개인기와 폭발적인 외곽슛, 그리고 엄청난 운동능력은 팬들의 이목을 사로잡았고, 연일 화려한 득점 쇼가 이어졌다. 클리퍼스에서 일약 에이스가 된 프리는 그의 평균 득점을 거의 두 배 가까이 상승시키며 올-NBA 세컨드 팀에도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너무나도 자유로웠다. 프리는 농구가 5명이서 하는 스포츠라는 걸 무시한 선수였다. 그는 슛을 해서는 안될 상황에서도 자유롭게 슛을 했고, 했고, 또 했다. 그의 플레이는 자유의 단계를 넘어서 거의 방종 수준이었다. 팀 승리보다 개인 스탯 올리는 게 더 중요하다고 떠들어대던 선수기도 하니 오죽했을까.

또한 제멋대로인 그의 성격은 종종 라커룸 분위기를 흐리곤 했다. 팀 동료들은 그의 실력은 인정했지만 그의 뒤틀린 성격까지 인정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그는 매일 밤 1:9의 농구를 해댔다.

아무튼 프리의 득점 쇼와 버팔로 시절부터 터줏대감이었던 베테랑 랜디 스미스(Randy Smith)의 활약 하에 클리퍼스 호는 첫 항해에서 B+ 정도의 무난한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근데 보면 도박에 처음 손대는 초보자가 돈을 따는 경우가 흔히 있다. 그래서 그 초보자는 자부심에 찬 나머지 그 다음 판에서 대담한 베팅을 하다가 쪽박을 차곤 한다.

클리퍼스의 베팅도 대담했다. 그들이 올-인한 카드는 바로 빌 월튼(Bill Walton)이었다.

 

월튼은 한때 NBA 최고의 선수였다. 76-77시즌 소속팀 포틀랜드를 NBA 우승으로 이끌었고, 이듬해에는 리그 MVP도 차지했다. 하지만 그는 77-78시즌 중에 치명적인 발 부상을 입어 78-79시즌을 통채로 쉬어야 했다. 그의 부상은 커리어 자체를 뒤흔들 수 있을 만큼 심각했고 재기가 불투명했다.

첫 해에 제법 괜찮은 성적을 올렸지만 흥행은 부진했던 클리퍼스는 티켓 판촉의 타개책으로 포틀에서 개점 휴업중인 월튼의 영입을 추진했다. UCLA 대학의 전설이었던 그는 캘리포니아 주의 농구 영웅이었고, 또한 샌디에이고에서 고등학교를 다녔었다. 그들은 샌디에이고가 배출한 역대 최고의 농구 선수라면 흥행과 성적 향상에 충분한 밑거름이 될거라고 굳게 믿었다. 그가 당한 심각한 부상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이다.

월튼에 대해 반 포기상태였던 포틀랜드는 클리퍼스가 공짜로 월튼을 FA로 데려가는 것까진 용납하지 않았고, 결국 클리퍼스는 주전 파워포워드 커밋 워싱턴(Kermit Washington), 7풋의 백업 센터 케빈 커너트(Kevin Kunnert),  1라운드 픽과 35만불의 현금을 댓가로 바쳤다.

하지만 야심차게 영입한 월튼 카드는 알고보니 쪽박패였다. 긴 부상 공백으로 인해 그의 내구성은 실드 없는 아칸 수준에 불과했던 것이다. 결국 월튼은 79-80 시즌 고작 14경기밖에 뛰지 못한 채 또다시 부상으로 쓰러져버렸다.

프리가 평균 30.2득점을 올리며 2년 연속 리그 득점 2위에 랭크되었고, 쓰러진 월튼 대신 주전 센터로 활약한 스웬 네이터(Swen Nater)가 평균 15리바운드로 리그 리바운드 1위를 차지하며 선전했지만, 팀 성적은 오히려 전년보다 추락했다. 클리퍼스는 시즌 중반만 해도 한때 26승 21패의 호성적을 달리며 잘나가나 싶더니, 이후로는 겨우 9승을 추가하는 데 그치며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최종 성적은 35승 47패로 당연히 플레이오프 탈락이었다.

떨어진 팀 성적 만큼이나 팀 분위기는 가라앉았고 에이스 프리는 늘어나는 득점만큼이나 팀원들과 불화를 쌓아갔다. 특히나 부상으로 코트에 서지 못하는 월튼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며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결국 클리퍼스는 시즌이 끝나고 프리를 골든 스테이트로 트레이드하며 분위기 쇄신을 꾀했다. 리그 평균 득점 2위인 프리를 내준 댓가로 클리퍼스가 받은 건 필 스미스(Phil Smith)란 가드와 미래의 1라운드 픽이었다.

스미스는 과거 올스타 경력도 있는 좋은 선수였지만 당시 부상으로 하향세를 걷고 있었고 평균 득점은 프리의 절반에 불과했다. 프리같은 팀의 간판 스타를 내준 댓가 치고는 영 시원찮아 보였지만, 프리가 워낙에 팀 케미스트리 파괴자로 악명을 떨치다보니 울며 겨자먹기로 도매급 판매를 한 셈이다. 훗날 샌 안토니오가 데니스 로드맨(Dennis Rodman)을 내주는 댓가로 겨우 윌 퍼듀(Will Perdue)를 받아온 것과 비슷한 시츄에이션이었다.

선장도 새로 바꼈다. 진 슈 감독이 물러난 자리에 선수 시절 블루 워커로 이름을 날린 폴 사일러스(Paul Silas)가 새로 부임했다. 현역에서 은퇴한 지 곧바로 한 팀의 감독이란 중책을 맡은 사일러스는 당시만 해도 37살의 신출내기였다.

하지만 클리퍼스 호의 항해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월튼은 여전히 회복 불가의 상태였고 또 한 시즌을 통으로 개점 휴업내야 했다. 월튼도 없고~ 프리도 없고~ 그나마 프리맨 윌리엄스(Freeman Williams)와 스웬 네이터가 분전해봤지만 결국 클리퍼스는 36승에 그치며 또다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계속된 성적 난조와 흥행 부진에 시달리던 구단주 어브 레빈은 결국 시즌 도중 클리퍼스 구단을 L.A의 갑부 도널드 스털링(Donald Sterling)에게 팔아버렸다. 클리퍼스와 스털링 간의 길고 긴 악연(?)은 바로 이때부터 맺어진 것이다.

법률가 출신의 스털링은 비버리 힐스 일대에서 부동산으로 떼돈을 번 수완가였다. 그런데 하루는 그의 고객이자 레이커스의 구단주인 제리 버스(Jerry Buss)가 NBA 구단을 운영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해왔고, 스털링은 자금난에 시달리던 클리퍼스를 12.5mil에 사들이며 어엿한 NBA 구단주가 되었다.

하지만 스털링이 보기에도 샌디에이고란 도시는 영 매력없는 프랜차이즈였다. 클리퍼스의 성적이 신통치 못한 점도 있었지만 리그에서 거의 매년 꼴찌를 다툴 정도로 티켓 판매가 부진했으니 말이다. 대신 스털링은 자신의 홈타운인 로스 앤젤레스(Los Angeles)로 연고지를 옮길 궁리를 하고 있었고, 이를 위해 본격적으로 로비에 들어갔다. 이제 샌디에이고에 또다시 NBA 팀이 사라지는 건 시간 문제였다.

81-82시즌은 클리퍼스에겐 악몽과도 같았다. 월튼은 2년 연속 개점 휴업 간판을 내걸었고, 월튼을 대신해 클리퍼스의 골밑을 수호하던 스웬 네이터마저 무릎 부상으로 쓰러져버렸다. 그들의 성적은 17승 65패로 처참했으며, 프랜차이즈가 출범한 이래 버팔로 시절까지 합쳐 최악의 부진이었다.

그나마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 유일한 희망은 드래프트 1라운드로 뽑은 루키 톰 체임버스(Tom Chambers)였다. 백인이었지만 놀라운 운동능력을 보유한 체임버스는 루키임에도 불구하고 평균 17.2득점으로 팀 내 득점 1위를 차지했다.

82-83시즌이 시작하자 드디어 그들의 잊혀진 영웅 빌 월튼이 컴백했다. 의사들도 한때 재기가 불가능하다고 포기했었지만 월튼은 굳은 의지로 여러 차례의 수술을 감내하며 다시금 코트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만신창이가 되버린 그의 몸은 메딕 없는 스팀팩 마린이었다. 경기를 연속으로 뛰게 되면 영영 쓰러질지도 모를 몸상태였기에 의사들은 윌튼에게 1주일에 1번만 경기에 뛰도록 허락했고, 그는 시즌 내내 고작 33경기에 출장해야 했다.

평균 14.1득점, 9.8리바운드, 3.6블록슛을 기록한 윌튼은 비록 부상으로 망가진 몸이었지만 코트에 서있는 시간만큼은 여전히 위력적인 센터였다. 그러나 제 아무리 잘해도 세 게임에 한 번 꼴로 출장해서는 팀 성적 향상에 별 보탬이 될 수 없었다.


한편 82년 드래프트에서 전체 2위로 뽑힌 테리 커밍스(Terry Cummings)는 평균 23.7득점, 10.6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신인왕에 올랐고, 2년차인 체임버스는 17.6득점을 보탰다. 이 두 젊은 포워드들의 활약상은 놀라웠지만 어린 선수들에게만 의지해서는 리그에서 승수를 쌓기 힘들었고, 클리퍼스는 고작 25승에 그쳤다.

83-84시즌을 앞두고 클리퍼스호는 제법 큰 물갈이를 단행했다. 폴 사일러스는 NBA 감독 일이 힘들다는 경험치만 잔뜩 얻은 채 짐 라이넘(Jim Lynam)에게 바통을 넘겼다. 또한 두 차례의 큰 트레이드를 거치며 팀 구성원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첫번째로 그들은 시애틀에 포워드 톰 체임버스와 가드 알 우드(Al Wood), 그리고 드래프트 픽 몇 개를 넘기는 대가로 7-2의 거구의 센터 제임스 도날드슨(James Donaldson), 포워드 그렉 켈서(Greg Kelser)와 역시 드래프트 픽 몇 개를 받아왔다.

풀 시즌을 뛰지 못하는 월튼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앞날이 창창한 유망주 포워드 체임버스를 내주면서까지 장신 센터를 데려온 것이다. 하지만 도날드슨은 그저 키만 큰 꺽다리에 불과했고, 체임버스는 훗날 올스타 포워드가 되었다.

한편 매직 존슨(Magic Johnson)을 앞세워 80년대 초 두 차례나 우승을 차지한 전통 명문 옆동네 레이커스에서 약간의 알력 다툼이 있었다. 당시 레이커스의 주전 포인트가드를 흔히들 매직 존슨으로 알고 있지만 80년대 초반까지는 베테랑 놈 닉슨(Norm Nixon)이 주전 포가였고, 매직은 포지션은 지금의 르브론, 웨이드처럼 포인트가드가 아니면서도 팀 내 제 1의 컨트롤 타워 역할을 했다.

한마디로 80년대 초반 레이커스에는 실질적으로 두 명의 포인트가드가 코트 위에서 뛰는 셈이었다. 이 둘의 뛰어난 리딩에 힘입어 머리 둘 달린 용 레이크드래곤은 두 개의 챔피언 링을 차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매직은 자신이 본격적으로 풀타임 포인트가드가 되길 원했고, 그럴려면 닉슨을 몰아내야 했다. 당시 레이커스에서 매직의 입김은 절대적이었고, 결국 레이커스에서 6년이나 주전 포가로 활약한 닉슨은 매직에게 밀려나 정든 팀을 떠나야 했다.

닉슨 트레이드의 거래 대상이 바로 옆동네 클리퍼스였다. 클리퍼스는 닉슨과 에디 조던(Eddie Jordan), 2개의 2라운드 픽을 데려오는 댓가로 83년 드래프트에서 전체 4번으로 뽑은 바이런 스캇(Byron Scott)과 부상으로 망가진 노장 센터 스웬 네이터를 보냈다.

클리퍼스에서 지명된 스캇은 이 트레이드로 레이커스에서 데뷔하게 되었고, 이후 레이커스의 주전 슈팅가드로 활약하며 3번의 우승에 훌륭한 조력자 역할을 해냈다.



클리퍼스에서 2년차 시즌을 맞게 된 테리 커밍스는 22.9득점, 9.6리바운드를 기록하며 팀의 확고한 에이스 자리를 지켰고, 새로 클리퍼스 호의 키를 잡게 된 조타수 닉슨은 그동안 매직에게 눌린 설움을 풀기라도 하듯 평균 11.1 어시스트로 매직에 이어 리그 어시스트 2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이들의 활약보다 더 고무적인 것은 월튼의 늘어난 출장 경기 수였다. 악몽같은 부상에서 복귀해 1주일에 1번만 뛰는 철저한 몸관리로 한 시즌을 무사히 마친 뒤 월튼의 몸상태는 더더욱 좋아졌고, 83-84 시즌에는 55경기나 뛸 수 있었다. 월튼 본인으로선 부상으로 시름한 지 5시즌 만에 50경기 이상을 소화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더이상 그의 실력은 팀 성적을 좌지우지할만한 슈퍼 스타급이 아니었고, 팀에서는 젊은 제임스 도날드슨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길 바랬다. 어렵게 건강을 찾은 월튼이었지만 대신 수많은 부상의 악령들과 싸우며 그의 천재적인 농구 재능은 거의 바닥나버린 것이었다.

클리퍼스는 팀에 많은 변화를 주었음에도 30승 52패란 암울한 성적에 그쳤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샌디에이고 클리퍼스에겐 고3 기말고사 성적표가 되고 말았다.

자신의 구단 클리퍼스를 L.A로 옮기려는 스털링의 로비는 끝내 성공했고, 클리퍼스 호는 샌디에이고 항구를 끝나 L.A 항구에 닻을 내릴 준비를 하게 되었다. 바야흐로 NBA 최악의 만년 꼴지 구단 L.A 클리퍼스 호가 진수식(進水式)을 눈앞에 둔 것이다. (3부에 계속)

샌디에이고 클리퍼스의 통산 성적

78-79시즌 43승 39패 승률 .524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 감독 진 슈(43-39)
79-80시즌 35승 47패 승률 .427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 감독 진 슈(35-47)
80-81시즌 36승 46패 승률 .439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 감독 폴 사일러스(36-46)
81-82시즌 17승 65패 승률 .207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 감독 폴 사일러스(17-65)
82-83시즌 25승 57패 승률 .305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 감독 폴 사일러스(25-57)
83-84시즌 30승 52패 승률 .366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 감독 짐 라이넘(30-52)

6시즌 통산 186승 306패 승률 .378 플레이오프 0회 진출

< 저작권자 ⓒ 뛰어(www.ddueh.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