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퍼스, 그 험난했던 항해일지 제 3장 - 부상 병동, 80년대 L.A 클리퍼스
샌디에이고에서 L.A로 연고지를 옮긴 클리퍼스는 트레이드로 지역 스타 마퀴스 존슨을 데려오며 야심차게 첫 시즌(84-85시즌)을 시작했다. 하지만 연승 뒤에 연패에 빠지는 젊은 팀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채 큰 성적 향상은 이뤄내지 못했다. 이듬해엔 보스턴의 스타 세드릭 맥스웰을 데려왔지만, 주전 슈팅가드 데릭 스미스가 부상으로 쓰러지며 또다시 좋지 못한 성적에 그쳤다.
엘진 베일러를 새 단장으로 임명한 클리퍼스는 86-87시즌을 앞두고 놈 닉슨이 부상당한데 이어 마퀴스 존슨마저 쓰러지며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되었다. 고작 12승에 그친 클리퍼스는 이듬해 명장 진 슈를 감독으로 임명했지만 놈 닉슨이 재차 부상당하는 등 악재가 끊이지 않으며 또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88 드래프트에서 프랜차이즈 사상 최초로 1픽을 거머쥔 클리퍼스는 대학 최고의 스타 대니 매닝을 지명했고 찰스 스미스, 게리 그랜트마저 뽑으며 최고의 드래프트 데이를 보냈지만, 부상의 악몽은 그치지 않았다. 매닝마저 시즌-아웃당한 클리퍼스는 무려 19연패에 빠지며 또다시 바닥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이듬해엔 89 드래프트 전체 2픽으로 뽑은 대니 페리가 클리퍼스로의 합류를 거부하며 이탈리아 리그로 가버리자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그를 클리블랜드로 트레이드하고 대신 론 하퍼를 받아왔는데 하퍼가 대활약을 펼치며 전화위복이 되었다. 하지만 하퍼 역시 잘나가다가 부상으로 중도에 아웃되었고 팀 성적 또한 동반 추락하며 끝없는 부진의 터널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의 터널
구단주 도널드 스털링(Donald Sterling)의 열망으로 인해 클리퍼스는 중소도시 샌디에이고(San Diego)를 떠나 빅 마켓 로스 앤젤레스(Los Angeles)에 새 둥지를 틀게 되었다. 바로 로스 앤젤레스 클리퍼스(Los Angeles Clippers)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1970-1971시즌 버팔로 브레이브스(Buffalo Braves)란 이름으로 리그에 첫 발을 디딘 이 프랜차이즈는 창단한 지 근 14년이 되어가지만 여전히 말년 하위팀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밥 맥아두(Bob McAdoo)와 잠깐 함께 했던 시절엔 플레이오프에 3년 연속 진출하기도 했지만, 호환, 마마보다도 더 나쁜 구단주 존 브라운(John Brown)이 맥아두를 팔아먹은 이후로 그들은 줄곧 플레이오프와 인연을 맺지 못했다.
연고지를 버팔로에서 수천마일 떨어진 샌디에이고로 옮기고, 클리퍼스(Clippers - 쾌속선)라는 멋들어진 새 이름까지 달았지만 상황은 별로 나아지지 못했고, 샌디에이고에서 머문 6년 동안 끝끝내 홈팬들에게 플레이오프 진출이라는 반가운 소식을 들려주지 못한 채 씁쓸히 그들은 L.A로 이삿짐을 꾸려야 했다.
1984-1985시즌, 드디어 L.A 클리퍼스 호가 역사적인 진수식(進水式)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들 앞에 펼쳐질 항로가 밝을지 어두울 지는 아직 아무도 몰랐지만...
새 팀에 부임한 신참 단장 칼 쉬어(Carl Scheer)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진부한 명언을 실천하기 위해 빅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바로 지난 2년간 팀의 리딩 스코어러 역할을 해 온 신예 포워드 테리 커밍스(Terry Cummings)를 보내고 대신 올스타 경력의 베테랑 포워드 마퀴스 존슨(Marques Johnson)을 데려온 것이다.
마퀴스 존슨은 원조 "포인트 포워드(Point Foward)"로 불리는 다재다능한 선수로, 돈 넬슨(Don Nelson)이 이끌던 80년대 강호 밀워키 벅스(Milwaukee Bucks)에서 시드니 몽크리프(Sidney Moncrief)와 함께 선봉대장 역할을 해왔다. 4번이나 올스타에 오른 경력이 있는 실력자기도 했지만 또한 UCLA 대학 출신의 지역 스타라는 점이 쉬어 단장의 눈길을 끌었다.
클리퍼스는 이전 연고지인 버팔로 시절부터 만성적인 흥행 부진에 시달렸다. 버팔로에서 샌디에이고로 연고지를 옮기게 된 것도 흥행 부진이 한 몫을 했고, 샌디에이고 시절에도 부진은 여전했다.
대도시 L.A로 연고지를 이전했으니 예전보다 상황은 좀 나아 보였지만, 단독 연고지도 아니고 L.A 레이커스(L.A Lakers)라는 터줏대감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 상황이니 L.A 시민들에게 어필할 만한 뭔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던진 비장의 흥행 카드가 바로 지역 출신 올스타 포워드 마퀴스 존슨이었던 것이다.
강력한 백코트 진에 비해 상대적으로 골밑이 약해 고전해야 했던 밀워키로선 20득점-10리바운드가 가능한 젊은 빅맨인 커밍스를 마다할 리 없었고, 결국 두 팀 간의 트레이드가 단행되었다. 클리퍼스는 테리 커밍스, 리키 피어스(Ricky Pierce), 크레익 호지스(Craig Hodges)를 밀워키로 보내고, 대신 마퀴스 존슨과 주니어 브릿지맨(Junior Bridgeman), 하비 캐칭스(Harvey Catchings)와 약간의 현금을 받아왔다.
이로써 전열을 정비한 클리퍼스는 베테랑 포인트가드 놈 닉슨(Norm Nixon)과 '포인트 포워드' 마퀴스 존슨, 그리고 전도유망한 슈팅가드 데릭 스미스(Derek Smith)로 1-2-3번 라인업을 꾸렸고, 건강을 되찾은 빌 월튼(Bill Walton)과 장신 센터 제임스 도날드슨(James Donaldson)이 골밑을 책임지게 되었다. 연고지도 옮겼겠다, 로스터도 갈아치웠겠다... 이제 그들에게 필요한 변화는 루징 팀을 위닝 팀으로 만드는 것 하나뿐이었다.
출발은 순탄했다. 첫 원정 두 경기에서 1승 1패를 거둔 클리퍼스는 그들의 홈구장인 L.A 메모리얼 스포츠 아레나(Los Angeles Memorial Sports Arena)에서 역사적인 첫 홈경기를 갖게 되었다. 1984년 11월 1일, 만 2천명의 홈팬들이 그들의 새 친구를 구경하기 위해 운집한 가운데, 클리퍼스는 동부의 강호 뉴욕 닉스(New York Knicks)를 107-105로 누르며 홈 승리의 첫 테이프를 끊었다.
이후 클리퍼스는 잠시 주춤하다가 12월 중순에 내리 6연승을 달리며 14승 14패로 5할 승률을 기록, 일약 다크호스로 떠올랐다. 하지만 그들의 질주는 딱 거기까지였다. 이후 내리 7연패에 빠지며 상승세가 꺾인 클리퍼스는 한때 11연패까지 당하며 걷잡을 수 없는 지경까지 추락하고 말았다. 이 와중에 감독인 짐 라이넘(Jim Lynum)이 경질되고, 어시스트 코치인 돈 체이니(Don Chaney)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체이니는 그나마 남은 시즌을 9승 12패로 마치며 나름대로 선전했다. 최종 팀 성적은 31승 51패. 야심차게 시즌을 시작했지만 전년도 샌디에이고에서의 마지막 시즌(30승 52패)과 비교해 고작 1승을 추가하는 데 그친 것이다. 클리퍼스는 내리 연승을 하다가도 이내 연패를 하는 등 전형적인 젊은 팀의 한계를 드러내며 첫 데뷔 시즌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는 실패했다. 하지만 이 팀은 젊었고 희망이 있었다.
특히나 데릭 스미스의 활약은 눈부셨다. 3년차 슈팅가드인 그는 평균 22.1득점으로 팀 내 1위를 기록하며 일약 신성으로 떠올랐다. 전년도(9.8득점) 보다 득점을 두 배 이상 상승시켰으니 만약 이때 MIP 상이 있었으면 그가 따 놓은 당상이었을 것이다. 스미스에 대한 기대치가 어느 정도였냐면 당시 루키로서 돌풍을 일으킨 시카고 불스(Chicago Bulls)의 마이클 조던(Michael Jordan)과 신흥 라이벌로 불릴 정도였다.
빌 월튼은 커리어 최다인 67경기에 출장하며 부상의 악령은 이제 툴툴 털어버린 듯 했고, 놈 닉슨은 올스타로 선발되었다. 베테랑과 신예들이 잘 조화를 이룬 클리퍼스는 지금 당장보다 내후년이 기대되는 팀이었다.
1985-1986시즌을 앞두고 클리퍼스는 1985 드래프트 전체 3번픽으로 크레이튼(Creighton) 대학 출신의 7푸터 베누와 벤자민(Benoit Benjamin)을 지명했다. 당시만 해도 벤자민은 리그의 탑 센터로 성장할 재목이라는 평가를 받던 대단한 유망주였다.
팀의 미래를 책임질 센터감을 구한 쉬어 단장은 또 한 번 과감한 트레이드를 감행했다. 클리퍼스 시절 내내 부상 악몽에 시름했던 빌 월튼을 보스턴 셀틱스(Boston Celtics)로 보내고 대신 1980-1981 파이널 MVP 출신이자 보스턴의 주전 파워 포워드인 세드릭 맥스웰(Cedric Maxwell)을 데려온 것이다.
클리퍼스와 월튼이 함께 한 지난 6년은 애증의 세월이었다. 월튼은 심각한 부상으로 두 시즌이나 통째로 쉬어야 했고, 나머지 시즌에서도 부상으로 제대로 출장하지 못한 경우가 다반사였다. 6년 동안 169경기... 부지런한 선수가 2년 남짓 뛰면 출장할 수 있는 경기 수였지만 월튼에겐 무려 6년이 걸렸다.
그나마 막판엔 건강이 좀 나아지며 출장 경기수가 좀 늘어났지만, 잦은 부상은 한때 리그 MVP였던 그의 재능을 다 갉아먹은 채 평범한 주전 센터로 만들어버렸다. 요즘 팬들이 보기엔 그랜트 힐(Grant Hill)과 올란도 매직(Orlando Magic)의 관계라고 치면 이해가 빠를 거다.
아무튼 월튼은 부상으로 얼룩진 파란만장한 커리어를 뒤로 한 채 수천마일 떨어진 보스턴으로 떠났다. 하지만 그가 떠났어도 한 천재의 커리어를 망가뜨린 잔인한 '인저리 데빌(Injury Devil)'은 클리퍼스를 떠나지 않았다. 그 사악한 악마는 이제 월튼을 놓아둔 채 새로운 숙주를 찾아 L.A의 밤거리를 호시탐탐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끔찍한 클리퍼스 부상 병동의 암흑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85-86 시즌 클리퍼스의 시작은 특급 모터를 달은 듯 했다. 개막전 이후 무려 5연승을 달린 클리퍼스는 그 기간 동안 평균 116점을 퍼부으며 만인들을 놀라게 했지만, 5연승 뒤 다시 8연패라는 극악의 반전으로 전년도의 악습을 못 버리는 듯 보였다. 하지만 8연패보다도 더 뼈아픈 건 송두리째 잃어버린 팀의 미래였다. 떠오르는 스타 데릭 스미스가 11경기 만에 무릎 부상으로 쓰러져버리고 만 것이다. 그냥 단순한 부상이 아니라 스미스의 커리어를 통째로 망쳐버릴 만한 심각한 부상이었다.
팀의 리딩 스코어러이자 미래를 잃어버린 그들이 호성적을 거둘 리는 만무했다. 베테랑 마퀴스 존슨이 스미스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생애 5번째로 올스타에 오르기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클리퍼스는 32승 50패를 기록하며 전년도보다 1승을 추가하는 데 그쳤다. 데릭 스미스가 건강하던 때 팀이 파죽의 연승을 달렸다는 걸 감안하면 그의 공백은 너무나도 뼈아팠다. 하지만 이게 앞으로 닥칠 클리퍼스의 끔찍한 부상 악몽의 전주곡이란 사실은 아직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팀이 2년 연속 부진한 성적에 그치자 단장인 칼 쉬어도 졸지에 물러나야 했다. 그리고 새 단장으로 예전 L.A 레이커스의 레전드인 엘진 베일러(Elgin Baylor)가 부임했다. 베일러와 클리퍼스 구단 간의 길고 긴 20여년의 악연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신임 단장 베일러가 부임하자마자 팀에 숭례문 화재급 악재가 일어났다. 주전 포인트가드 놈 닉슨이 공원에서 소프트볼을 즐기다가 무릎 부상을 당한 것이다. 상태가 심각해 수술이 불가피했고, 결국 닉슨은 시즌-아웃 판정을 받고 말았다. 그리고 이 황당한 부상은 과거 레이커스 시절 매직 존슨과 주전 포인트가드 자리를 다투기도 했던 민완 가드 닉슨의 커리어를 꺾어버리고 말았다.
주전 포인트가드 자리가 졸지에 공석이 되어버리자 베일러는 이 공백을 메우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결국 부상 중인 젊은 스타 데릭 스미스와 베테랑 스윙맨 주니어 브릿지맨, 백업 가드 프랭클린 에드워즈(Franklin Edwards)를 새크라멘토 킹스(Sacramento Kings)로 보내고, 대신 포인트 가드 래리 드류(Larry Drew), 슈팅 가드 마이크 우드슨(Mike Woodson)과 미래의 1라운드 픽, 2라운드 픽을 각각 1장씩 받아왔다.
드류와 우드슨도 킹스에서 오랜 기간 활약한 베테랑들이지만 올스타 레벨의 닉슨과 스미스의 공백을 메우기엔 2% 부족했다. 그래도 일단 급한 불은 끈 클리퍼스는 뭔가 불안한 가운데 1986-1987 시즌을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데릭 스미스가 무릎을 부여잡고 쓰러진지 불과 1년여 만에 또 다른 부상의 악몽이 그들을 찾아왔다.
세번째 비극의 주인공은 마퀴스 존슨이었다. 존슨은 불과 시즌 10번째 경기에서 팀 동료 베누와 벤자민과 강하게 충돌하며 목 부위에 심각한 충격을 입었고, '원조 포인트 포워드'였던 그의 커리어도 이렇게 끝을 맺고 말았다.
너무나도 끔찍했다. 불과 1년 여만에 팀의 간판스타 세 명이 모두 커리어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부상을 당하며 쓰러져버렸으니 말이다. 스미스는 부상 이후 평범한 스윙맨으로 전락한 뒤 29살의 젊은 나이에 리그를 떠나야 했고, 닉슨과 존슨은 부상 이후 두 시즌 넘게 재활과 씨름하다가 겨우 복귀했지만 예전의 기량을 다 잃어버린 채 둘 다 1년 만에 은퇴해야 했다. 이 정도라면 저주라고 불러도 이상할 게 없다.
빌 월튼과 함께 했던 샌디에이고 시절부터 따라다니던 지긋지긋한 부상 악령... 이제 연고지도 L.A로 옮기고 월튼도 떠났건만 여전히 악성 댓글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클리퍼스를 괴롭히는 것이었다.
너무나도 황당한 부상으로 두 명의 간판스타를 연이어 잃은 클리퍼스는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12승 70패라는 최악의 성적으로 시즌을 마감해야 했다. 1972-1973 시즌 필라델피아 76ers가 9승 73패를 거둔 이후 두 번째로 나쁜 시즌 성적이었다. 훗날 달라스(1992-1993시즌)와 덴버(1997-1998시즌)가 각각 11승을 기록하며 나중엔 2위 자리를 내주게 되지만 말이다.
팀이 헤어 나올 수 없는 나락으로 빠진 가운데 베일러는 대놓고 리빌딩을 시작했다. 어차피 그른 시즌이라고 보고는 팀의 간판 베테랑들을 팔아버리고 대신 드래프트 픽을 잔뜩 얻어온 것이다.
주전 파워포워드 세드릭 맥스웰은 휴스턴 로케츠의 1라운드 픽, 2라운드 픽과 엿바꿔먹었고, 백업 빅맨 커트 님피우스(Kurt Nimphius)는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의 1라운드 픽, 2라운드 픽과 엿바꿔먹었다. 안그래도 팀이 어려운데 베테랑들을 이렇게 시즌 도중에 팔아먹었으니 12승이란 성적도 감지덕지할 정도다.
팀이 최악의 퍼포먼스를 펼친 와중에 감독의 모가지가 온전할 리 만무했다. 결국 돈 체이니는 경질되었고 베일러는 새 선장을 찾아 나섰다. 전임 감독들인 짐 라이넘과 돈 체이니가 감독 경력 초짜들이라 어리버리댔던 점을 감안해 이번엔 노련한 베테랑 감독을 노려보기로 했고, 그 대상은 바로 진 슈(Gene Shue)였다.
슈는 리그에서 무려 20년의 경력을 지닌 명장 중의 명장이었다. 통산 757승으로 그때 당시만 해도 통산 승리 4위에 랭크되어 있었고, 올해의 감독상을 두 차례나 수상한 바 있었다. 또한 예전에 성적이 바닥권이었던 볼티모어 불레츠(Baltimore Bullets)와 필라델피아 76ers(Philadelphia 76ers)를 모두 파이널로 이끌며 이른바 '리빌딩의 거장'으로 불리던 감독이었다. 또한 슈는 이전 샌디에이고 클리퍼스에서도 잠깐 지휘봉을 잡으며 1978-1979 시즌엔 5할 이상의 호성적을 기록한 적도 있었다. 이처럼 슈는 당시 클리퍼스의 어려운 상황을 타개해 줄 구세주처럼 보였다.
한편 베일러의 적극적인 세일즈 덕에 1987 드래프트에서 클리퍼스는 무려 3장의 1라운드 픽(4번, 13번, 19번)을 쥐고 있었다.
우선 4픽으로 클리퍼스는 조지타운(Georgetown) 대학의 에이스 레지 윌리엄스(Reggie Williams)를 선발했다. 윌리엄스는 1984년 패트릭 유잉(Patrick Ewing)과 함께 조지타운 호야스(Georgetown Hoyas)를 NCAA 챔피언으로 이끌었으며, 유잉이 떠난 뒤로는 팀의 독보적인 에이스로 활약했다. 13픽으론 노스 캐롤라이나(North Carolina) 대학의 조 울프(Joe Wolf)를, 19픽으론 일리노이(Illinois) 대학의 켄 노먼(Ken Norman)을 각각 지명하며 알찬 신인 보강을 마쳤다.
그러나 1987-1988 시즌 개막을 앞두고 클리퍼스에겐 또다시 안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부상에서 회복해 절치부심하던 놈 닉슨이 시즌 개막 이틀을 앞두고 연습 도중에 아킬레스건이 파열되고 만 것이다.
부상의 악령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특급 신인으로 큰 기대를 받았던 레지 윌리엄스마저 무릎 부상으로 고작 35경기밖에 출장하지 못했고, 조 울프도 42경기 출장에 그쳤다.
부상자들이 속출하며 팀이 어지럽게 표류하자 명장 진 슈 감독도 속수무책이었다. 야심찬 감독 영입과 신인 지명이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간 클리퍼스는 17승 65패로 2년 연속 리그 최하위에 머물러야 했다.
그나마 이런 암울한 가운데 클리퍼스 팬들에게 한 줄기 등불은 주전 파워포워드 마이클 케이지(Michael Cage)의 폭풍 리바운드 쇼였다. 케이지는 시카고의 찰스 오클리(Charles Oakley)와 리바운드 타이틀을 놓고 마지막까지 피말리는 승부를 벌렸고, 결국 시즌 최종 경기에서 30리바운드를 기록한 케이지가 오클리를 누르고 소수점 차이로 리바운드 왕에 올랐다. (케이지 13.03개, 오클리 13.00개)
감독도 바꿔보고 트레이드도 해보고 드래프트 픽도 모아보고... 어떻게든 루징 팀에서 벗어나보려는 클리퍼스의 노력은 눈물겨웠지만 결과는 또다시 최악이었다.
그러던 중 프랜차이즈 역사상 일생일대의 찬스가 찾아왔다. 바로 1988 드래프트 전체 1번 픽을 클리퍼스가 거머쥐게 된 것이다.
1988 드래프트는 이른바 '매닝 드래프트'였다. 당시 대학 최고의 선수인 대니 매닝(Danny Manning)이 바로 이론의 여지가 없는 확실한 1픽 후보였던 것이다.
매닝의 소속팀 캔자스(Kansas) 대학은 그야말로 매닝의 원맨팀이었고 매닝 이외의 나머지 동료들은 형편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닝은 캔자스 대학을 NCAA 우승으로 이끄는 대파란을 연출했다.
4학년 때 시즌 평균 24.8득점과 9리바운드를 기록한 매닝은 코트 위에서 모든 걸 다 할 수 있는 최고의 올라운더였다. 6-10의 빅맨이 가드처럼 드리블하고 패스하고 슛을 하며 그야말로 대학 농구 코트를 지배했으니 말이다. 결국 네이스미스 상(Naismith Award), 우든 상(Wooden Award) 등 최고의 대학 선수에게 주어지는 상들을 싹쓸이한 매닝은 1988 드래프트에서 전체 1픽으로 클리퍼스의 지명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베일러 단장은 최고의 대학 스타를 얻은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전년도 리바운드 1위였던 마이클 케이지를 시애틀 슈퍼소닉스(Seattle Supersonics)로 보내는 대신 1988 드래프트 전체 15번 픽으로 지명한 게리 그랜트(Gary Grant)와 미래의 1라운드 픽을 얻어왔고, 6번 픽으로 지명한 허시 호킨스(Hersey Hawkins)와 시애틀로부터 얻은 1라운드 픽을 필라델피아로 보내고, 대신 전체 3번 픽으로 지명한 찰스 스미스(Charles Smith)를 데려왔다.
이렇게 드래프트 데이에 무려 3명의 대학 스타를 데려오며 희망차게 1988-1989 시즌을 시작한 클리퍼스는 하지만 또 한 번 부상 악령에 눈물을 삼켜야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초로 얻은 1번 픽으로 뽑은 특급 신인 대니 매닝이 고작 26경기만 뛴 채 아킬레스 건 부상으로 시즌 아웃되고만 것이다.
만약 우리나라였다면 정말 무당 불러 굿이라도 한판 했을 것이다. 아니면 어메리칸 스타일로 엑소시즘이라도 하던가... 도대체 팀의 간판스타 내지는 미래를 책임질 슈퍼 루키들이 벌써 몇 시즌 째 부상으로 연달아 쓰러지는 건지...
매닝의 부상 소식과 함께 이 팀의 희망도 다 사라져버린 듯 보였다. 매닝 부상 전까지 10승 19패를 거두며 그나마 3할대 승률을 기록하고 있던 클리퍼스는 충격의 연패 행진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보는 이들을 애처롭게 했다. 결국 11연패 만에 감독인 진 슈가 짤리고 어시스턴트 코치 돈 케이시(Don Casey)가 주저주저 바통을 이어받았지만 이후로도 8패를 더해 무려 19연패를 기록하고 말았다.
다행히 돈 케이시 감독대행이 연패 뒤에 팀을 잘 추스려 마지막 20경기에서 5할 승률을 거두며 21승 61패로 시즌을 마친 클리퍼스는 신생팀 마이애미 히트(15승 67패), 샬럿 호네츠(20승 62패)라는 착한 동생들 덕에 다행히 3년 연속 리그 꼴찌는 면하게 되었다.
그래도 젊은 선수들의 분전은 인상적이었다. 2년차 포워드 켄 노먼은 평균 18.1득점, 8.3리바운드로 팀을 이끌었고, 루키인 찰스 스미스는 16.3득점을 보태며 올-루키 퍼스트 팀에 올랐다. 매닝의 부상과 19연패의 악몽은 팀을 또 한 번 나락으로 떨어뜨렸지만 시즌 후반에 보여준 선전과 젊은 선수들의 활약은 침몰해가는 클리퍼스 호에게 한 줄기 희망의 등대불이었다.
NBA는 참 공평한 리그이다. 클리퍼스처럼 몇 년 째 바닥에서 허덕이는 팀들을 구제하기 위해 귀중한 로터리 픽들을 마구잡이로 풀어주니 말이다. 대학 최고의 스타를 뽑고도 부상에 울어야 했던 클리퍼스는 1989 드래프트에선 전체 2픽을 손에 넣으며 한 번 더 대박을 터뜨릴 기회를 잡게 되었다.
그들의 선택은 듀크 대학의 에이스인 대니 페리(Danny Ferry)였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돌발 사태가 벌어졌다. 페리가 "클리퍼스같은 팀에선 뛰기 싫다."며 계약을 거부하더니 급기야 이탈리아 리그로 날라버린 것이다.
세상에 얼마나 싫었으면 모든 선수들이 선망하는 L.A같은 빅 마켓을 연고지로 둔 팀을 다 마다했을까. 그만큼 당시 클리퍼스는 리그에서 공인된 최악의 팀이었다. 또한 클리퍼스에서 뛰는 선수들 마다 끔찍한 부상에 시달리는 것도 꽤나 꺼림칙했을 것이다.
게다가 클리퍼스에는 페리의 포지션에 이미 대니 매닝, 찰스 스미스, 켄 노먼같은 젊은 유망주들이 득실거렸다. 듀크대같은 명문 팀에서 웰빙 선수 생활을 하던 페리로선 부상신의 저주를 받은 클리퍼스같은 깜깜한 동네에서 가뜩이나 벤치 노릇을 해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으리라. 머리로는 괘씸해도 마음으로는 이해가 간다.
페리의 도주 퍼포먼스에 당황하던 베일러 단장은 결국 못 먹는 감 남 주는 수밖에 없었다. 클리퍼스는 도주범 대니 페리와 부상 이후 영 시원찮던 레지 윌리엄스를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로 보내고, 대신 민완 가드 론 하퍼와 2장의 1라운드 픽, 1장의 2라운드픽을 받아왔다.
하지만 인생지사 새옹지마라던가. 여태껏 트레이드로 별 재미를 못 본 클리퍼스지만 울며 겨자 먹기로 한 이번 트레이드만큼은 결과가 꽤 좋았다.
페리는 클리블랜드 이적 후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했지만 그저 그런 평범한 선수에 그치며 대학 시절 명성에 먹칠을 하고 말았다. 반면에 론 하퍼는 이후 클리퍼스의 에이스로 올스타급 활약을 펼쳤다. 비록 운이 따르지 않아 끝내 올스타에 선발되진 못했지만 말이다.
클리블랜드 시절부터 탁월한 기량을 과시하던 만능 가드 론 하퍼는 이적하자마자 일약 팀의 에이스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또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저번 시즌 아킬레스 건 부상으로 시즌-아웃되었던 대니 매닝이 건강한 모습으로 이번 시즌 초반에 복귀한 것이다. 매닝은 복귀 뒤에도 부상 악령을 완전히 떨친 듯 괜찮은 모습을 보여주며 팀 관계자들의 시름을 한 숨 놓게 했다.
2년차 포인트가드 게리 그랜트가 팀을 전두 지휘하는 가운데 론 하퍼와 찰스 스미스가 내외곽에서 평균 20점 이상의 고감도 득점포를 가동하고, 대니 매닝, 켄 노먼 등 준수한 포워드들이 뒤를 받쳤으며, 베테랑 센터 베누와 벤자민이 골밑을 든든하게 지킨 클리퍼스는 말년 동네북 신세에서 벗어나 이제 제법 주목할 만한 젊은 팀으로 거듭난 듯 보였다. 시즌 초반 16승 19패를 기록한 그들에게는 어느덧 5할 승률도 꿈 속 이야기가 아닌것 같았다.
하지만 이렇게 해피하다면 절대 클리퍼스 스토리가 아니다. 대놓고 클리퍼스만 다굴하는 지긋지긋한 부상의 악령은 이번엔 평균 23득점을 기록하며 팀의 상승세를 이끌던 에이스 론 하퍼의 무릎을 탁 걷어차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한 달도 채 못 되어 평균 두 자릿수 어시스트를 기록하던 주전 포인트가드 '제네랄(General)' 게리 그랜트마저 악령에게 피격당하고 말았다.
지난 몇 년간의 암흑의 터널에서 모처럼 빠져나오나 싶었던 클리퍼스의 야심찬 89-90시즌도 결국 이처럼 비극으로 끝을 맺고 말았다. 최종 성적은 30승 52패. 전년도보다 9승을 더하긴 했지만 결코 만족할 수 없는 시즌이었다.
4대 비극보다 더 슬픈 클리퍼스의 부상 악몽은 과연 언제쯤 끝나는 것일까? 어쨌든 클리퍼스는 이렇게 암흑의 80년대를 마치고 90년대로 진입하게 되었다.
버팔로 브레이브스 시절인 1975-1976 시즌 이후로 무려 14년간 계속되어온 플레이오프 탈락의 징크스는 과연 90년대에는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 것인지... 새로운 시대가 왔지만 여전히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검은 안개는 쉽사리 걷히지 않을 듯 보였다. (3부에서 계속됩니다)
L.A 클리퍼스 80년대 성적
1984-1985시즌 31승 51패 승률 .378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 감독 짐 라이넘(22-39), 돈 체이니(9-12)
1985-1986시즌 32승 50패 승률 .390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 감독 돈 체이니(32-50)
1986-1987시즌 12승 70패 승률 .146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 감독 돈 체이니(12-70)
1987-1988시즌 17승 65패 승률 .207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 감독 진 슈(17-65)
1988-1989시즌 21승 61패 승률 .256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 감독 진 슈(10-28), 돈 케이시(11-33)
1989-1990시즌 30승 52패 승률 .366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 감독 돈 케이시(11-33)
2008/12/18 - NBA와 크리스마스.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들
2008/12/11 - 악동들의 숨겨진 영향력
2008/12/11 - 9승 12패. 필라델피아의 문제는 무엇인가 - 3부
2008/12/10 - 서서히 드러나는 레이커스의 문제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