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블랜드의 '자유로운 영혼' 딜론테 웨스트
프리 시즌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10월 중순,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로스터에서 한 선수의 이름이 지워졌다. 지난 여름 팀에서 가장 늦게 3년 재계약 협상을 마무리했던 딜론테 웨스트였다. 지난 시즌까지 웨스트가 맡았던 포인트가드 포지션에 모리스 윌리암스가 가세했고 마이크 브라운 감독이 아직 결정되지 않았던 선발 슈팅가드 포지션 후보중 한 명으로 그를 고려하고 있던 시점이었기 때문에, 웨스트의 갑작스런 팀 이탈은 많은 팬들의 궁금증을 자아냈다. 구단에서도 명확한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팬들의 궁금증은 커져만 갔다.
이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두가 알고 있다. 웨스트는 팀을 떠나있던 2주 동안 평생에 걸쳐 그를 괴롭혀온 우울증과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본인의 노력과 동료들의 따뜻한 관심으로 팀에 복귀한 웨스트는 클리블랜드의 주전 슈팅가드로 낙점, 평소처럼 견실한 플레이를 펼치며 클리블랜드가 7연승을 거두는 데 공언하고 있다.
강팀에서 순탄하게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는 웨스트지만 그의 인생이 항상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다른 몇몇 선수들과 같이 웨스트도 평범한 생활을 위해 싸워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1983년생으로 홀어머니 밑에서 태어난 웨스트는 메릴렌드에서 어머니와 외가 친척들과 함께 자랐다. 그리 여유있는 생활은 아니었다. 친구들과 전화를 할 때도 항상 음식 이름으로 통화를 마칠 정도였다. 웨스트는 ‘바베큐 소스’를 좋아했고, 지금도 3점슛을 넣은 후에는 ‘바베큐 소스’라고 중얼거린다. 어렸을 때부터 농구에 소질을 보인 웨스트는 일찌감치 농부구에 들어갔지만, 다른 아이들이 농구 연습을 하거나 웨이트 트레이닝을 할 때 공사장에 나가 벽돌을 나르며 힘을 키워야 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영부인의 이름을 딴 엘리노어 루즈벨트 고등학교로 진학한 웨스트는 팀을 처음으로 주 챔피언십 결승에 올렸다. 비록 아깝게 준우승에 머무르긴 했지만, 졸업반 시절 단 한 경기를 제외하고 모두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한 웨스트는 NCAA 팀들의 스카우트 표적이 됐다. 웨스트는 평소 흠모하는 마이크 말론이 감독으로 재직하던 맨하탄 콜리지로 가고 싶었지만, 말론 감독 본인이 나서 웨스트를 설득한 끝에 마침내 명문 세인트 조셉 대학교의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3년 후, 주전 슈팅가드로 성장한 웨스트는 백코트 파트너인 자미어 넬슨과 함께 팀을 정규시즌 27승 무패로 이끌었다. 세인트 조셉 대학은 사상 처음으로 전미 랭킹 1위에 올랐다. 비록 넬슨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긴 했지만, 웨스트는 팀내 최고의 3점 슈터이자 수비수였다.
자신의 능력을 확신한 웨스트는 마침내 2004년 드래프트에 나섰다. 하지만 1라운드가 끝나갈 때까지 그의 이름은 불리지 않았다. 포인트가드로 쓰기에는 리딩 능력이 달리고, 슈팅가드로 쓰기에는 193센티미터에 불과한 신장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23명의 선수가 지명된 끝에 게리 페이튼의 백업 가드를 찾던 보스턴이 마침내 24번째 지명권을 웨스트에게 행사했다. 웨스트의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죠. 크리스 월러스 단장님이 지명자를 발표하기 전 저를 불러서 ‘보스턴 셀틱스 선수가 된 기분이 어떤가?’ 하고 물으셨어요. 마치 사나운 개가 저를 쫓아올 때 간이 오그라드는 기분이더군요. 하나님 맙소사, 꿈은 이루어지고 기도는 통한 거죠.”
대학 시절 15번을 달았던 웨스트는 보스턴의 영구 결번 선수 때문에 15번을 달 수 없게 되자, 의리 깊은 메릴렌드 사내답게 어린 시절 친구의 번호인 13번을 선택해 루키 시즌을 시작했다. 하지만 웨스트의 프로 첫 시즌은 그리 순탄하지 못했다. 스타팅 라인업에는 들지 못해도 식스맨으로 꽤 많은 출장시간을 얻을 것으로 기대됐지만, 오른손에 연달아 부상이 발생하면서 부상자 명단에 오르고 만 것이다. 웨스트는 이 부상 때문에 43경기를 결장해야 했다.
시즌 후반이 되어 부상에서 회복하자, 닥 리버스 감독은 웨스트의 출장 시간을 늘리기 시작했다. 때마침 주전 가드인 페이튼이 부상당하면서 웨스트가 선발 포인트가드로 나서기도 했다. 페이튼과 함께 웨스트를 장신 포인트가드로 쓰려는 리버스 감독의 구상 때문에 대학 시절과는 다른 포지션에서 뛰게 되었지만, 웨스트는 새로운 역할에 적응하려 노력했다. 웨스트의 성실성을 눈여겨본 리버스 감독은 이듬해 페이튼이 팀을 떠나자 주전 포인트가드로 웨스트를 선택했고, 웨스트는 막 리빌딩에 들어간 팀의 공격을 잘 이끌며 감독의 기대에 부응했다. 올스타 주간에 벌어진 루키 챌린지에는 대학 시절 콤비였던 넬슨이 부상당하면서 대신 참가하기도 했다. 이듬해 팀에 합류한 라존 론도나 세바스찬 텔페어와 함께 출장시간을 나눠갖기는 했지만, ‘리빌딩 팀 보스턴’의 첫 번째 포인트가드는 항상 웨스트였다.
보스턴에서 순탄하게 선수생활을 이어나갈 것 같았던 웨스트였지만, 2007년 드래프트 데이 아침에 벌어진 트레이드는 그의 운명을 바꾸어놓았다. 지속적인 리빌딩 대신 신속한 전력강화를 선택한 대니 에인지 보스턴 단장이 시애틀 슈퍼소닉스의 에이스 레이 앨런과 글렌 데이비스를 받는 대가로 웨스트와 신인 제프 그린, 월리 저비악을 시애틀로 보낸 것이다. 시애틀은 팀에는 얼 왓슨이 주전 포인트가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왓슨 못지않게 기대를 받고 있던 루크 리드노어도 있었기 때문에, 웨스트의 설 자리는 좁아져 갔다.
트레이드 마감일 직전에 웨스트는 또다시 팀을 옮겨야 했다. 시애틀이 클리블랜드, 시카고와의 3각 트레이드를 통해 도넬 마샬과 이라 뉴블, 애드리언 그리핀을 받는 대가로 월리 저비악과 함께 클리블랜드로 트레이드된 것이다. 웨스트는 새 팀 클리블랜드에서 선발 포인트가드 자리를 되찾았다. 에이스 르브론 제임스가 리딩을 도맡는 클리블랜드의 시스템에 적응하는 데 다소 시간이 걸렸지만, 정규 시즌이 끝나갈 즈음 웨스트는 팀의 승리에 빠질 수 없는 선수가 되었다.
1라운드에서 워싱턴을 누른 클리블랜드는 정규 시즌 최강팀 보스턴과 2라운드를 치르게 되었다. 1년만에 상전벽해의 변화를 이룬 친정팀을 만난 웨스트의 매치업 상대는 그가 보스턴에 있을 때 세 번째 포인트가드였던 론도였다. 하지만 빅3와 함께 한 시즌을 보낸 론도는 자신의 강점인 최대 강점인 숨막히는 수비력으로 웨스트를 압박했고, 웨스트는 보스턴에서 벌어진 1,2차전에서 야투율 20%에 그치는 최악의 부진을 보였다. 비록 3차전에서 21득점을 기록하며 위닝샷까지 넣기는 했지만, 웨스트는 시즌 내내 론도에게 고전해야 했다. 결국 친정팀과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패한 웨스트는 불과 1년 전까지 자신이 소속되어 있던 팀이 우승을 차지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그 시리즈 박스스코어가 아직까지 제 안주머니에 들어있어요. 지갑을 꺼낼 때마다 튀어나오죠. 볼 때마다 화가 나서 다시 집어넣곤 하는데, 이번 시즌 끝나면 없애버릴 겁니다.”
비록 우승팀에게 아깝게 패하기는 했지만, 클리블랜드 팬들은 르브론을 도울 가드를 얻었다는 데 만족했다. ‘전임자’ 래리 휴즈가 팀 시스템과 맞지 않았기 때문에, 포인트가드치곤 장신이면서 슈팅력도 좋은 편인 웨스트에게 기대를 건 것이다. 하지만 웨스트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 클리블랜드 프런트는 오프시즌 동안 밀워키에서 포인트가드 모리스 윌리암스를 데려왔고, 마침 재계약을 앞두고 있던 웨스트는 또다시 입지가 불안해졌다. 윌리암스는 웨스트보다 슈팅과 패싱이 뛰어났고 기존 멤버 중 전 시즌에 큰 발전을 이룬 대니얼 깁슨 또한 웨스트와 포지션이 겹쳤기 때문이다. 클리블랜드에서 웨스트와의 재계약을 포기하거나 트레이드 카드로 쓴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심지어 러시아 리그로 간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재계약 협상이 좀처럼 진척되지 않았기 때문에 소문은 점점 신빙성을 얻어갔다.
하지만 클리블랜드와 웨스트는 아직 서로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클리블랜드는 부상 이력이 있는 윌리암스를 영입하면서 보조 리딩을 해줄 ‘보험’이 필요했고, 어렵게 자란 웨스트는 가족을 부양할 새 계약이 필요했던 것이다. 웨스트는 마침내 클리블랜드와 3년간 총액 1270만 달러의 계약에 합의했다. 웨스트의 능력이나 가능성에 비하면 그리 높은 금액은 아니었지만 웨스트는 만족했다. “재계약이 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이 돈으로 우리 어머니 집을 사드릴 거고, 외삼촌 이도 해드릴 겁니다. 여동생 대학 등록금도 댈 수 있게 됐죠. 저는 이제 농구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됐어요.”
하지만 웨스트가 농구에 집중하려면 넘어야 하는 벽이 남아있었다. 바로 평생 그를 괴롭혀온 우울증이었다. 첫 증상은 팀 자체 청백전 도중 나타났다. 심판을 보고 있던 웨스트의 고등학생 시절 심판과 웨스트 사이에 충돌이 일어난 것이다. 웨스트는 심판의 콜에 비정상적으로 화를 냈고, 좀처럼 평정심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웨스트 스스로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상태로는 팀 분위기에 해를 끼칠 가능성이 높았다. 우리나라보다 개방적이라는 미국에서도 우울증을 인지하고서도 치료를 거부하는 경우가 많은데다가 운동선수가 정신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앞으로 선수생활을 하는 데 약점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웨스트는 무엇이 중요한지 아는 판단력과 해야 할 말을 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선수였다. 웨스트는 브라운 감독과 동료들에게 자신의 병을 솔직히 고백하고 치료를 위해 잠시 팀을 떠났다.
웨스트가 병과 싸우는 동안 팀에서는 웨스트를 위해 많은 배려를 했다. 웨스트 스스로가 말하기 전에는 그의 병에 대해 절대 언급하지 않았고 그의 사생활을 지켜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르브론과 앤더슨 바레장을 비롯한 동료들도 그에게 하루에도 몇 번씩 안부 전화를 하며 웨스트가 고독을 느끼지 않도록 노력했다.
2주 후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온 웨스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주전 슈팅가드’ 자리였다. 당초 이 자리에 나설 것으로 보이던 사샤 파블로비치가 좀처럼 컨디션을 회복하지 못하자 마이크 브라운 감독이 웨스트를 선택한 것이다. NBA에서 4년간 포인트가드로 뛰던 웨스트는 마침내 자신의 원래 포지션에서 뛰며 리딩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심리적 안정감은 곧바로 성적 향상으로 이어졌다. 윌리암스와 함께 뛰면서 그의 공격 우선순위는 선발 라인업에서 네 번째로 밀렸지만, 대신 왼손잡이의 특성을 최대한 살리며 확실한 찬스에서 부담 없이 슛을 던지는 등 공격 효율성을 크게 끌어올렸다. 51.4%의 야투율과 46.5%의 야투율은 커리어 최고 기록이고, 당초 출장시간이 줄어들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지난 시간보다 늘어난 평균 34.5분을 출장하고 있다. 코칭스태프가 그만큼 웨스트를 믿고 있다는 뜻이다. 팀 리더인 르브론 역시 ‘웨스트는 우리 팀에 꼭 필요한 선수다. 우리는 그가 없이는 우승할 수 없다’며 그를 칭찬했다.
코트 위에서의 견실한 플레이와는 달리 농구화를 벗은 웨스트는 대단히 재미있는 남자다. 스스로를 ‘자유로운 영혼’이라 부르는 웨스트는 자신을 예술가라 생각하고 있으며, 틈만 나면 그림 그리기나 시 짓기에 열중한다. 기자들과 인터뷰할 때면 의도적으로 라임을 살리며 랩을 하듯 답변하고, 알아듣지 못할 말을 떠들어댄다. 라커룸에서는 ‘Get The Money' 같은 노래를 큰 소리로 불러댄다. 노래 실력? 팀 동료 테런스 킨제이의 평가다.
“못 들어주겠습니다. 윌리암스나 깁슨도 음치지만 웨스트를 따라갈 수는 없어요. 웬만하면 들어주려 하지만 정말 끔찍해요.”
웨스트는 이런 독특한 캐릭터 때문에 클리블랜드에 온 지 얼마 안 됐는데도 많은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팀 리더인 르브론과는 달리 아직 독신이기 때문에 여성팬들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다. 이런 웨스트의 이상형은 어떨까? “제 영혼은 자유롭습니다. 어떤 스타일의 여성이라도 괜찮아요. 하지만 전 아직 젊고 농구선수로써의 인생을 좀더 즐기고 싶습니다.”
웨스트는 그리 순탄한 인생을 살아오지 못했다. 하지만 웨스트는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보고 진지하게 해결할 줄 아는 진정한 용기를 갖췄다. 모든 고난을 훌륭히 극복해온 웨스트는 이제 저 앞을 바라보고 있다. 그의 몸에 새겨진 문신 문구처럼 ‘Sunshine After Rain'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웨스트가 따스한 햇살을 느끼는 날, 무려 30여년간 어느 프로팀도 우승하지 못한 클리블랜드에도 마침내 성공의 빛이 찾아들 것이다. 그리고 그 날이 올 때까지 웨스트의 쉼없는 전진은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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