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퍼스, 그 험난했던 항해일지 제 1장 - 버팔로 브레이브스 시절
L.A 클리퍼스는 L.A 레이커스와 스테이플스 센터(Staples Center)를 홈구장으로 함께 쓰고 있는 구단이다. 하지만 기나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 구단 레이커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너무나도 초라한 팀 역사와 시원찮은 성적 때문에 대표적인 비인기구단, 만년 꼴지 구단으로 인식되어 왔다. 게다가 역대 구단주들의 형편없는 투자와 팀 경영때문에 '짠돌이 구단', '유망주들의 무덤'으로 인식되기도 했었다.
그들이 NBA에 첫 발걸음을 드리운 건 70-71시즌으로,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가 그들과 NBA 입단 동기생 프랜차이즈들이다. 당시에는 뉴욕 근처 버팔로(Buffalo)라는 작은 도시를 프랜차이즈로 한 "버팔로 브레이브스(Buffalo Braves)"란 이름으로 출범을 했고, NHL의 버팔로 세이버스(Sabres)와 홈구장(Buffalo Memorial Auditorium)을 같이 썼다.
초대 감독은 과거 시라큐즈 내셔날즈(역주: Syracuse Nationals, 현 필라델피아 76ers의 전신)의 전설적인 선수였던 돌프 쉐이즈(Dolph Shayes)였다. 하지만 신생팀이 늘 그렇듯 그들의 초반 행보는 갓 전입온 이등병마냥 어리버리했다. 데뷔 첫 해 같은 내무반 동기생들인 이병 클블, 이병 포틀과 함께 리그 꼴찌 1, 2, 3등을 사이좋게 나눠가진 이병 버팔로는 첫 3시즌동안 도합 65승을 거두며 NBA 내무반 바닥을 열심히 닦았다. 72-73시즌, 팀 성적은 21승 61패에 그쳤지만, 향후 팀의 미래를 바꿔놓는 두 거목이 버팔로에 뿌리를 내렸다. 한 명은 훗날 포틀랜드를 NBA 우승으로 이끌기도 한 명장 잭 램지(Jack Ramsey) 감독, 그리고 또 한명은 그해 신인상을 수상하며 혜성같이 등장한 밥 맥아두(Bob McAdoo)였다.
73-74시즌이 시작하자 버팔로는 이제 더이상 고참팀들의 갈굼에 시달리는 약체가 아니었다. 램지 감독의 뛰어난 지휘력 하에 시작된 버팔로의 질주는 맹렬했다. 이제 고작 2년차인 맥아두는 평균 득점 30점을 넘기며 리그 득점왕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고, 팀 성적은 전년도의 딱 두배인 42승으로 급상승했다. 창단 4년만에 플레이오프 무대에 처녀 출전한 버팔로는 비록 전통 명문 보스턴 셀틱스에게 컨퍼런스 준결승에서 2-4로 무릎을 꿇었지만 그들의 선전은 괄목상대할만했다.
용감한 소떼들의 질주는 이듬해에도 계속되었다. 맥아두는 여전히 발군의 득점력을 선보이며 평균 34.5득점을 넣어 2년 연속 득점왕에 올랐고, 시즌 MVP까지 차지하며 리그 최고의 선수로 우뚝 섰다. 버팔로는 리그에서 세번째로 많은 49승을 거두며 작년의 선전이 '리얼'임을 입증했다. 플레이오프에선 엘빈 헤이즈(Elvin Hayes), 웨스 언셀드(Wes Unseld)가 버티고있던 70년대 강호 워싱턴 불리츠와 컨퍼런스 준결승에서 혈전을 벌인 끝에 3-4로 아쉽게 패하고 말았지만, 그들의 미래는 참으로 밝아보였다.
75-76시즌에도 버팔로의 선전은 계속되었다. 팀 성적은 46승으로 전년도에 비해 약간 주춤하긴 했지만 3년 연속 플레이오프 출석부에 이름을 올렸고, 맥아두는 3년 연속 30+ 득점을 하며 또다시 득점왕에 올랐다. 플레이오프에선 1라운드에서 필라델피아 76ers를 꺾으며 컨퍼런스 준결승에서 보스턴과 격돌했지만 2년 전과 같이 2-4로 패해 탈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 전도유망한 용감한 소떼들에게 예기치못한 끔찍한 재난이 찾아왔다. 75-76시즌이 끝나고 당시 구단주였던 폴 스나이더(Paul Snyder)는 팀을 팔기 위해 매물로 내놨다. 팀 성적은 괜찮은 편이었지만 워낙에 버팔로가 스몰 마켓이다보니 티켓 판매만으로는 적자 운영을 면키 힘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스나이더는 버팔로 구단을 재력가인 존 브라운(John Brown)에게 팔았다. 존 브라운. 참 하찮고 평범한 미국식 이름이지만 농구계에 다시 있어서는 안될 해충같은 이름이기도 하다.
브라운은 KFC를 세계적인 패스트푸드 체인점으로 성장시킨 수완 좋은 사업가였고, ABA의 명문 구단 켄터키 콜로널스(Kentucky Colonels)를 소유한 경력도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농구란 혼이 담긴 스포츠가 아닌 그저 돈벌이 수단에 불과했다. 그는 팀 팔기에 여념이 없던 스나이더에게 버팔로 구단을, 지금으로 치면 NBA 선수 미드레벨 연봉 정도인 620만불이라는 제법 저렴한 가격에 사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헐값 매도의 배경에는 구단 운영으로 생기는 수익금 일부를 스나이더에게 나눠줘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있었다. 팀을 구한 브라운은 구단 운영으로는 돈벌기가 영 신통치 않은 걸 보고는 스나이더에게 줄 돈이 너무 아깝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자기 돈을 덜쓰고 스나이더 몫을 떼어 줄 수 있는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그의 계획은 너무나도 끔찍했다. 바로 팀 내에서 가장 시장 가치가 있는, 3년 연속 득점왕을 차지했던 팀의 심장인 슈퍼 스타 밥 맥아두를 딴 구단에 팔아먹는 것이었다.
결국 브라운은 자신의 호주머니를 지키기 위해 맥아두를 76-77 시즌 도중 뉴욕으로 현금 + @를 받고 트레이드해버렸다. +@로 받아온 선수는 뉴욕의 주전 센터 존 지아넬리(John Gianelli)였는데, 그의 시즌 기록은 평균 10득점, 9리바운드였다. 3년 연속 리그 득점왕에 MVP도 차지했던, 당대 최고의 슈퍼 스타를 데려 온 댓가가 바로 평범한 센터 하나와 구단주 뱃속으로 들어갈 모종의 현금이 되버린 것이다.
상상해보시라. 만약 클리블랜드가 르브론 제임스를 뉴욕으로 팔아넘기면서 그 댓가로 데이빗 리를 얻어온다면? 레이커스가 코비 브라이언트를 시카고로 팔아넘기면서 그 댓가로 드류 구든을 얻어온다면? 그리고 이런 말도 안되는 거래를 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구단주의 개인 재산 부풀리기때문라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 않은가! 맥아두의 활약 속에 3년 연속 호성적을 거뒀던 버팔로의 성적은 30승 52패로 곤두박질쳤고, 플옵 연속 진출은 3년으로 끝나고 말았다. 어처구니없는 트레이드에 분노한 팬들은 모두 등을 돌렸고, 맥아두가 한창 뛰던 시절 리그 흥행에서 상위권을 차지했던 버팔로의 티켓 판매는 리그 최하위 수준으로 추락해버렸다.
브라운이 몰고 온 재난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브라운은 구단주에 취임하자마자 팀을 3년동안 잘 이끈 명장 잭 램지를 해고하고 대신 조 멀라니(Joe Mullaney)를 감독에 앉혔다. 멀라니는 전 ABA 켄터키 콜로널스 감독 출신으로, 브라운과는 이전부터 구단주와 감독으로 인연을 맺었었다. 이른바 낙하산 식 코드 인사인 것이다. 명장 램지를 내친 낙하산 인사의 결과는 과연 어땠을까? 멀라니는 29경기에서 11승 18패의 초라한 성적만 기록한 채 경질되었고, 이후 두 명의 감독이 잇달아 팀을 맡았지만 팀의 추락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구단주 하나 잘못 온 덕분에 불과 1년만에 팀의 좌우 기둥이던 감독과 에이스가 모두 사라져버린 것이다.
또한 시즌 초 버팔로는 ABA의 파산으로 인한 확장 드래프트를 통해 NBA의 포틀랜드에 지명되었던 젊은 모제스 말론(Moses Malone)을 트레이드로 데려왔지만, 말론은 단 두 게임만 뛴 채 미래의 1라운드 픽 2개를 얻는 조건으로 다시 휴스턴 로케츠으로 트레이드되었다. 그리고 바로 두 시즌 뒤에 말론은 휴스턴에서 MVP에 등극하며 리그 역사상 손꼽히는 레전드 센터가 되었다. 시즌 도중 맥아두를 잃었지만 드래프트에서 애드리안 댄틀리(Adrian Dantley)라는 괜찮은 신인을 뽑았고, 댄틀리는 4년전 맥아두가 그랬던 것처럼 신인왕을 차지하며 맥아두를 잃은 슬픔에 빠진 버팔로에 한줄기 희망이 되나 싶었다.
하지만 이게 웬걸... 댄틀리는 76-77 시즌 종료 후 인디애나 페이서스의 빌리 나이트(Billy Knight)와 트레이드되고 말았다. 물론 그때 당시만 해도 나이트는 리그 득점 2위(26.6득점)을 기록했던 특급 스윙맨으로 루키 댄틀리보다 가치가 떨어지는 선수는 아니었다. 결국 나이트는 버팔로에서 불과 1시즌만 뛴 채 트레이드되었고, 이후 평범한 스윙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에 반해 댄틀리는 훗날 유타에서 득점왕까지 올랐고 얼마전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되었다.
비록 말론과 댄틀리의 이적은 앞서 맥아두처럼 꼭 돈을 노리고 저지른 일은 아니었지만 팀에 꼭 필요한 트레이드라고는 볼 수 없었다. 또한 70년대에는 구단주의 파워가 지금보다 훨씬 막강했었고, 이런 뻘짓 무브들의 배경에는 분명 브라운의 저주받을 입김이 작용했을 터이다.
이처럼 한때 잘나가던 신생팀 버팔로는 존 브라운이라는 해충 구단주가 온지 1년여만에 그만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다. 멀쩡한 감독을 낙하산 인사로 바꾸었고, 구단주 개인 재산을 아끼기 위해 간판스타를 다른 팀으로 팔아넘기길 주저하지 않았다. 이뿐인가. 미래에 명전에 오를 젊은 유망주를 1년 안에 둘씩이나 트레이드 해버렸다. 결국 구단주가 안티였던 버팔로는 급속히 몰락의 길을 걸었다. 만신창이가 된 팀의 에이스 자리는 버팔로 주립대 출신으로 드래프트 7라운드의 전설인 랜디 스미스(Randy Smith)가 이어받았지만 맥아두의 공백을 메우긴 역부족이었다.
77-78시즌 27승에 그친 버팔로는 여전히 브라운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만행으로 텅텅 비어버린 관중석을 바라보던 브라운은 이 돈벌이 안되는 구단을 팔아버릴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마치 잠자리 날개, 다리 다 떼어놓고는 이제 시시하다고 발로 밟아버리는 잔인한 9살짜리 꼬마처럼 말이다.
장사 수완 만큼은 얄미우리만치 좋았던 그는 보스턴의 구단주 어브 레빈(Irv Levin)에게 손길을 뻗쳤다. 영화 제작자 출신인 레빈은 가능하면 자신의 사업장인 헐리우드에 가까운 서부 지역에 자신의 농구단을 가지기를 원했지만 그렇다고 전통 명문인 보스턴 프랜차이즈를 서부로 옮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를 간파한 브라운은 자신이 소유한 버팔로 구단과 레빈이 소유한 보스턴 구단을 서로 맞바꾸는 제안을 했다. 레빈 입장에서 보스턴 구단은 연고지 이전이 사실상 불가능하지만, 신생팀인데다가 연고지가 스몰 마켓인 버팔로 구단은 맘만 먹으면 서부 지역으로 옮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버팔로 구단과 버팔로 시 측은 예전에 구단의 티켓 판매가 일정 기준에 미달할 경우, 연고지를 옮길 수도 있다는 계약을 맺은 바도 있었기에 명분은 충분했다.
재밌는 사실은 두 구단주간의 스와핑 거래에서 중간에 다리를 놓은 인물이 바로 훗날 NBA 총재가 되는 데이빗 스턴(David Stern)이라는 점이다. 당시 스턴은 리그에서 컨설턴트로 활약하고 있었다. 결국 거래는 성사되어 브라운은 보스턴의 구단주로, 그리고 레빈은 버팔로의 구단주로 서로 자리를 맞바꿨다. '재앙신' 브라운의 이적은 버팔로 구단에겐 마치 앓던 이가 빠진 것과 같은 환희의 순간이었으나, 동시에 정든 버팔로 시와의 씁쓸한 이별의 예고편이기도 했다.
그럼 보스턴으로 건너간 브라운의 행보는 이후 어땠을까? 브라운은 버팔로에 이어 보스턴까지 제멋대로 말아먹으려고 마수를 뻗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소유했던 버팔로 구단에서 입맛에 맞았던 선수들을 데려오기 위해 기존의 보스턴 선수들과 대규모 트레이드를 단행해버렸다. 팀의 단장인 레드 아워백(Red Auerbach)과는 단 한마디 상의도 없이 말이다. 갓 부임한 풋내기 구단주가 셀틱스의 상징과도 같은 자신을 무시한데 대해 아워백은 분노했고, 이런 더러운 인간 밑에서 단장 노릇하느니 뉴욕 닉스의 단장으로 가버릴까 하는 고민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만류로 생각을 고쳐먹은 아워백은 대신 구단주 퇴진운동을 주도하며 자신을 건드린 댓가를 톡톡히 보여주기로 했다. 결국 브라운은 1년도 채 못채우고 보스턴 구단주 자리에서 떠밀리듯 물러나야 했다. 고소하기가 참 카라멜콘과 땅콩이다.
이후 브라운은 정치인으로 켄터키 주지사에 당선되는 등 성공한 정치가이자 재력가로서의 삶을 살았다. 하지만 적어도 농구팀 구단주로서 그는 역사상 최악의 인물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버팔로에서 불과 2년 동안 구단주로 있으면서 그가 저지른 만행을 다시 한번 정리해보자.
1. 팀을 3년 연속 플옵으로 이끈 명장 잭 램지 감독을 내치고 자신의 측근을 낙하산 감독으로 데려옴.
2. 자기 재산 아끼기 위해 3년 연속 득점왕을 차지한 팀의 슈퍼 스타 밥 맥아두를 뉴욕에 팔아먹음.
3. 모제스 말론을 포틀랜드에서 애써 데려오고도 이내 휴스턴으로 트레이드해버림.
4. 신인왕 애드리안 댄틀리를 고작 한 시즌만에 인디애나로 트레이드해버림.
이런 일들이 자신이 응원하는 팀에 불과 2년 사이에 마구 벌어진다고 상상해보자. 당시에는 아직 인터넷 개통 전이던게 브라운에겐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다시 버팔로 얘기로 돌아와서... 새로 버팔로를 인수한 신임 구단주 레빈은 자신의 바램대로 연고지를 서부 지역의 샌디에이고(San Diego)로 이전했다. 그러면서 프랜차이즈 이름도 태평양을 가로질러 항해하는 범선이라는 뜻의 "클리퍼스(Clippers)"로 바뀌게 되었다. 과연 샌디에이고 클리퍼스는 과거 버팔로 시절 존 브라운의 악몽에서 벗어나 새출발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의 출항은 막 돛을 드리웠지만 웬지 앞으로의 항해도 만만하지 않아 보였다. (2부에서 계속됩니다)
버팔로 브레이브스의 통산 성적
70-71시즌 22승 60패 승률 .268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 감독 돌프 쉐이즈(22-60)
71-72시즌 22승 60패 승률 .268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 감독 돌프 쉐이즈(0-1), 조니 맥카티, 22-59)
72-73시즌 21승 61패 승률 .256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 감독 잭 램지(21-61) * 밥 맥아두의 데뷔 시즌
73-74시즌 42승 40패 승률 .512 플레이오프 컨퍼런스 준결승 진출, 감독 잭 램지(42-40)
74-75시즌 49승 33패 승률 .598 플레이오프 컨퍼런스 준결승 진출, 감독 잭 램지(49-33) *밥 맥아두의 MVP시즌
75-76시즌 46승 36패 승률 .561 플레이오프 컨퍼런스 준결승 진출, 감독 잭 램지(46-36)
76-77시즌 30승 52패 승률 .366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 감독 조 멀라니(11-18), 밥 맥키넌(3-4), 테이츠 로크(16-30) *존 브라운이 구단주로 부임, 밥 맥아두를 뉴욕으로 트레이드한 시즌
77-78시즌 27승 55패 승률 .329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 감독 코튼 피츠시몬즈(27-55)
8시즌 통산 259승 397패 승률 .395, 플레이오프 3회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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