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 & COLUMNS/일반 뉴스 2009. 5. 20. 03:54

2009 NBA 서부컨퍼런스 결승전 프리뷰

BY 알 수 없는 사용자


글 : 턴오버LAKERS

2008-09 정규시즌 서부컨퍼런스 1위를 차지한 LA 레이커스와 2위 덴버 너겟츠가 파이널로 향하는 마지막 길목에서 5월 20일(한국시간) 첫 맞대결을 갖는다. 코비 브라이언트라는 확실한 에이스를 보유한 레이커스, 첸시 빌럽스를 영입한 후 완전히 다른 팀으로 변모한 덴버는 서부컨퍼런스 결승에서 치열한 승부를 펼칠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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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즌의 상대전적

2007-08 정규시즌에서 레이커스는 덴버를 3전 전승으로 제압했다. 뿐만 아니라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레이커스는 앨런 아이버슨과 카멜로 앤쏘니가 건재한 덴버에 단 한 경기도 내주지 않고 2라운드에 진출했다. 아이버슨과 앤쏘니는 매경기 47점을 합작했지만 평균 33.5점을 기록한 코비를 막지 못하며 무너져내렸다. 스윙맨을 저지할만한 퍼러미터 수비수가 부재했던 덴버는 파워포워드인 케년 마틴까지 코비에게 붙이는 강수를 둔 바 있다. 하지만 코비는 제 세상을 만난듯 덴버의 수비를 유린했고, 오히려 이로 인하여 골밑에 헛점을 드러내며 파우 가솔에게 제압당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번 시즌의 상대전적

덴버는 이번 시즌초 앨런 아이버슨을 디트로이트에 보내는 대신 콜로라도주의 스타플레이어인 빌럽스를 받아왔다. 그동안 공격력만큼은 리그 최고였지만 수비에서 허점을 드러냈던 덴버는 빌럽스의 가세로 점차 공수 모두 균형을 갖춘 팀으로 변화해갔다. 지난 시즌 107점에 달했던 경기당 실점이 이번 시즌 100.9점으로 줄어든 것이 그 반증이다.

레이커스와 덴버는 이번 시즌 네 차례 맞대결을 펼쳤고 3승 1패로 레이커스가 우세했다. 하지만 1차전은 빌럽스가 아직 덴버에 오기 전이었다는 점과 나머지 세 경기에서는 양팀이 현재와 같은 베스트 전력으로 맞붙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를 토대로 앞으로의 승부를 예측하기는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덴버 입장에서는 세 번째 대결에서 지긋지긋한 레이커스 전의 연패를 끊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2라운드까지의 두 팀

일찌감치 서부 1위를 확정짓고 1라운드에서 유타 재즈를 만난 레이커스는 4승 1패로 무난하게 2라운드에 진출해 휴스턴 로켓츠와 상대했다. 휴스턴은 이미 공격의 핵인 트레이시 맥그레이디, 정신적 지주나 다름없는 디켐베 무톰보가 시즌아웃된 상태였다. 게다가 고군분투하던 야오밍마저 3차전을 끝으로 결장하게 됨에 따라 레이커스의 손쉬운 승리가 예상되었다.

그러나 레이커스는 서부 1위팀답지 않게 롤러코스터와 같은 경기력을 보이며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가까스로 컨퍼런스 결승 진출에 성공했다. 접전이라기보다는 졸전이라는 표현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파우 가솔은 “휴스턴과의 시리즈는 우리가 하나의 팀으로서 단합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우리는 이를 증명할 것이다”라는 말로 컨퍼런스 결승에 임하는 레이커스 선수들의 의지를 대변했다.

반면 덴버는 1라운드에서 크리스 폴이 이끄는 뉴올리언스 호네츠를 4승 1패로 제압하며 카멜로 앤쏘니 입단 후 이어져온 1라운드 징크스를 허물며 쾌조의 출발을 보였다. 2라운드에서는 덕 노비츠키가 버틴 댈러스 매버릭스를 역시 4승 1패로 꺾고 순항을 거듭하며 1985년 이후 최초로 서부 결승에까지 올라갔다. 경기를 거듭할수록 수비조직력이 탄탄해진데다 계속된 승리로 자신감도 최고조에 달해 있는 상태이다. 조지 칼 감독은 “우리는 수비가 아주 뛰어난 팀은 아니지만, 공격만으로 레이커스를 이길 수 있을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최소 두 경기 정도는 수비를 통해 이겨야 한다”며 승리의 해답을 수비에서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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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를 위해 필요한 것은?

레이커스를 이끌고 있는 코비는 2008-09 시즌에서 덴버를 상대로 평균 31득점을 기록했다. 이는 여전히 덴버에 코비의 득점력을 제어할만한 수비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서 섣불리 더블팀으로 코비를 마크하면 앤드루 바이넘과 가솔이 인사이드에서 맹폭을 가할 가능성이 크다. 지금까지 덴버가 플레이오프에서 상대했던 뉴올리언스와 댈러스는 파워포워드가 중장거리에서 득점을 올리고 센터는 공격보다 수비에 주력하는 팀이었다. 따라서 덴버는 상대의 득점원인 파워포워드를 막는 데 힘을 집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레이커스는 다르다. 무릎부상에서 컴백한 후 한동안 경기적응과 마인드 문제로 고전했던 바이넘은 점점 자신의 사이즈를 믿고 공격시도를 늘려가고 있으며, 가솔은 휴스턴과의 7차전에서 볼 수 있듯 스피드와 센스를 이용해 인사이드를 지배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베테랑 데렉 피셔와 이번 시즌 3점슛을 장착한 트레버 아리자를 비워두어도 안 된다. 끊임없이 코트를 누비며 오픈찬스를 노리는 사샤 부야치치의 한방은 물론 3점과 돌파능력을 겸비한 조던 파마와 섀넌 브라운의 존재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반대로 덴버는 플레이오프가 되면 더욱 불타오르는 빌럽스의 존재 자체가 큰 강점이다. 또한 빌럽스와 앤쏘니가 이루는 원투펀치는 상대의 코비-가솔 듀오에 비해 뒤지지 않을만큼 꾸준하며, 클러치 상황에서 두둑한 뱃심을 자랑한다. 빌럽스는 돌파할 때 자신의 득점보다는 비어있는 동료를 찾아 패스하는 경우가 잦으므로, 아리자와 같은 선수들은 이 패스의 차단에 주력해야 한다. 발이 느린 피셔의 경우 빌럽스의 돌파를 막겠다고 간격을 두고 수비하면 여지없이 3점슛을 얻어맞을 가능성이 크다.

네네와 케년 마틴이 버티는 인사이드진은 레이커스의 바이넘-가솔에 비해 신장에서 열세를 보이지만, 그들의 끈기있게 몸싸움을 벌인다면 휴스턴을 상대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레이커스의 빅맨들이 고전할 수 있다. 벤치에서 소금과 같은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J.R. 스미스와 ‘버드맨’ 크리스 앤더슨의 존재도 호재다. 특히 레이커스로서는 섯부른 골밑공략은 절대금물이다. 덴버의 새로운 골밑 파수꾼으로 자리매김한 앤더슨에게 오늘의 탑10 하이라이트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며

이번 시즌 리그 1위를 차지한 클리블랜드를 제치고 우승 0순위로 꼽히던 레이커스는 휴스턴과의 접전을 거치며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도, 그들이 염원하는 우승을 위해서도 덴버는 반드시 넘어야 할 상대다. 덴버의 입장에서도 파죽지세로 컨퍼런스 결승까지 올라온 지금이야말로 우승을 노릴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고 할 수 있다.

두 팀의 피할 수 없는 첫 맞대결은 20일 오전 10시에 레이커스의 홈 스테이플스 센터에서 열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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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점 슛 챔피언‘ 제이슨 카포노가 전 NBA 스타인 하퍼와 함께 한국 땅을 밟을 예정이다. 3점 전문슈터로 알려진 카포노는 과연 어떤 선수일까?

이국적이고 조각같이 훤칠한 카포노의 얼굴은 포르투갈과 하와이 출신의 부모님에게 물려받았다. 혼혈 출신인 그는 미식축구 집안에서 태어난 또 다른 이색배경을 지니고 있다. 그의 아버지 토니 클라인은 과거 NFL 오클랜드 레이더스와 샌프란시스코 49ers에서 이름을 날렸고, 형 대런 클라인 역시 카포노의 모교인 UCLA에서 풋볼선수로 활약한 바 있다.

하지만 카포노는 캘리포니아에서 보낸 고교시절부터 프로농구선수를 꿈꿔왔다. 모든 고교선수들이 꿈꾸는 올아메리칸 맥도날드 대회에 이름을 올리며 UCLA에 입학한 카포노는 학교역사상 3위에 해당하는 2,095점을 올리며 주가를 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빅리그 입성에 앞서 가장 중요한 졸업시즌을 망치며 미래를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감독경질과 UCLA 역사상 최악의 성적으로 얼룩진 마지막 시즌은 카포노의 드래프트 순위를 끌어내리는데 한몫했다.

슈팅능력 하나는 탑클래스였지만 백인선수들의 고질적인 단점인 운동능력과 수비능력의 부재도 고민거리였다. 결국 이러한 문제들은 2003년 NBA 드래프트에서 2라운드 31번 픽으로 이어졌다. 전체 1번 픽으로 온갖 스포트라이트를 독점한 동기 르브론 제임스와는 대조되는 시작이었다.

이듬해 샬럿 밥캐츠가 창단하며 실시된 확장드래프트로 새둥지를 튼 카포노는 조금씩 발전의 기미를 보였다. 밥캐츠 구단 역사상 1호 블락을 성공시키기도 하며 가비지타임을 담당하던 클리블랜드 시절보다 더 큰 존재감을 드러냈다. 야투 성공률은 다소 낮았지만 2년 연속 4할 대의 고감도 3점 슛 성공률을 찍어내며 자유투도 8할 이상을 기록한 카포노는 안정적인 슈터의 이미지를 다졌다.

성공의 기회는 예상외로 일찍 찾아왔다. 마이애미 히트의 팻 라일리에게 러브콜을 받은 카포노는 당시 샤킬 오닐과 드웨인 웨이드의 다이나믹 듀오와 함께 구단 역사상 첫 우승에 일조하며 몸값을 해냈다.

이듬해 2006-07시즌을 맞이한 카포노는 이른바 ‘180클럽(필드골 성공률+3점 슛 성공률+자유투 성공률을 합산한 수치)’에 가입하며 화려하게 비상하였다. 이는 래리 버드나 레지 밀러, 페자 스토야코비치 등 리그 최고의 슈터들만이 가입한 성지였다.

수직상승하는 카포노의 가치는 그 해 여름 다시 한 번 매겨졌다. 토론토 랩터스와 4년간 2,400만 달러라는 잭 팟을 터트린 것이다. 리그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막강한 화력부대에 또 한명의 명궁이 가세하며 많은 이들은 토론토의 미래에 큰 기대를 드러냈다.

2007년과 2008년에는 마이애미와 토론토 소속으로 올스타전에 참가하며 공식 ‘3점 슛 왕’에 오르는 영광을 맛봤다. 올 시즌 라스베가스에서 열린 2009 올스타전에서 래리 버드와 크레익 하지스에 이어 사상 3번째로 3연패를 노렸지만 신예 대콴 쿡에 일격을 당하며 아쉽게 역사책을 새롭게 쓰는 데는 실패했다. 토론토도 오랜만에 플레이오프 진출이 좌절되며 개인적으로나 팀에게 암울했던 한 해였다.

하지만 카포노는 카를로스 델피노의 유럽행과 저메인 오닐의 트레이드, 감독 경질 등 수많은 우여곡절로 바람 잘 날 없던 토론토에 남아섰다. 올스타 크리스 보쉬와 스페인 특급가드 호세 칼데론, 그리고 베테랑 포워드 숀 메리언과 함께 토론토와 카포노의 제 2전성기를 기대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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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시카고 불스 주전멤버로 활약했던 론 하퍼가 한국을 방문한다.

사실 론 하퍼라는 이름은 NBA 농구에 심취한 열혈 매니아가 아니라면 다소 생소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흔한 포털사이트 인물사전에도 기록이 없는 선수이니 당연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아직도 시카고의 향수를 잊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하퍼의 존재가 가슴속 한 구석에 선명히 남아 있을 것이다.

하퍼는 과연 어떤 선수였을까?


최고의 스윙맨에서 나락으로

하퍼는 마이클 조던, 스카티 피펜, 데니스 로드맨 등 스타플레이어들과 함께 시카고의 3연패에 일조한 최고의 ‘조연’이었다. 하지만 그가 걸어온 농구인생을 되돌아보면 이보다 파란만장한 이야기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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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퍼는 마이애미 대학시절 공수에서 최고의 기량을 뽐내던 ‘주연‘이며 스타플레이어였다. 마이애미 재학시절 4년 동안 경기 당 19.8점을 기록한 하퍼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공격형 선수였다. 운동능력도 발군을 자랑하여 멋진 슬램덩크를 곧잘 성공시키던 하퍼를 두고 혹자들은 줄리어스 어빙과 비교하기도 하였다. 현역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어빙과의 첫 번째 대결을 꼽는 하퍼에게는 엄청난 영광이었다.
 
뛰어난 공격만큼이나마 수비도 빛이 났다. 스틸은 물론 리바운드와 블락에서도 웬만한 빅맨 급 이상의 기량을 발휘하여 하퍼는 공수에서 완벽한 스윙맨으로 거듭나있었다.

졸업 후 1986년 NBA 드래프트에 뛰어든 론 하퍼는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황금기를 이끌 브래드 도어티, 마크 프라이스와 함께 전체 8번 픽으로 프로에 입문한다.

루키 시즌은 하퍼에게 잊지 못할 한 해였다. 하퍼는 본인의 생애 최다 기록이자 루키 전체 1위인 경기 당 22.9점(리그 16위)으로 득점본능을 드러냈고 경기 당 2.6개의 볼을 훔치며 이 부문에도 리그 4위에 올라 신인왕을 예약한 듯 보였다. 하지만 인디애나 페이서스의 척 퍼슨에게 밀려 결국 최종 투표는 2위로 마감, 아쉬움을 남겼다.

두 번째 시즌을 맞이한 하퍼는 개막 두 달 만에 심각한 발목부상으로 단 25경기나 결장했다. 공격빈도는 출장시간과 함께 다소 줄어들었지만 수비력 하나는 여전했다. 건강을 되찾은 하퍼는 훗날 몸담게 될 시카고 불스와 피할 수 없는 플레이오프 라이벌전을 시작하게 된다. 상대는 자신과 비슷한 신체조건을 지닌 마이클 조던이었다. 때문에 당시 하퍼는 클리블랜드의 원정 유니폼 색에서 착안된 ‘오렌지 조던’이라는 별명까지 얻게 됐다.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하퍼는 조던과 함께 수년 뒤 시카고에서 역사상 가장 강력한 백코트 수비군단의 핵심인물이 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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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클리블랜드 시절의 하퍼 역시 조던의 여느 라이벌들과 다를 바 없는 신세였다. 시카고는 당시 해마다 디트로이트의 괴롭힘에 고배를 들었지만 클리블랜드 역시 뉴욕 닉스와 함께 시카고의 조연에 머물렀다. 특히 클리블랜드에 유독 강한 면모를 보였던 조던의 활약에 하퍼는 ‘제2의’라는 수식어에 만족해야 했다.

줄리어스 어빙의 후계자, 제2의 에어조던 같은 칭송은 하퍼에게 있어 더 없는 영광이었지만 결국 팬들과 농구관계자들에게 실망만 안겨주었다. 좋은 선수임은 분명했지만 주위의 기대를 충족시키기에는 충분히 높이 날지 못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빛났던 클리블랜드시절에는 남부럽지 않은 성적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올스타 무대를 밟아보지 못했다. 1987년부터 1988년까지 두 차례 슬램덩크 콘테스트에 참가하며 별들의 전쟁에 얼굴을 내밀었지만 쟁쟁한 공중곡예사들에 가려 이렇다할만한 인상도 심어주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프로생활의 첫 번째 전환점이 찾아왔다. 클리블랜드가 클리퍼스의 레지 윌리엄스와 신인 대니 페리를 받는 조건으로 하퍼와 미래의 드래프트 픽 3장을 넘기는데 합의한 것이다. 만년 약체팀으로 리그 모든 선수가 꺼리는 LA 클리퍼스에 새 둥지를 틀게 됐지만 전망은 그리 어둡지 않았다.


용꼬리보다는 뱀머리, 재능 앗아간 무릎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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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퍼스 입장에서 하퍼의 영입은 더 없는 선택이었다. 당시 클리퍼스는 대니 매닝와 찰스 스미스라는 전도유망한 선수들로 강력한 프론트라인을 구축하고 있었지만 백코트의 공격력 부재가 가장 큰 문제였다.

마지막 퍼즐을 채운 클리퍼스는 하퍼와 함께 새롭게 태어났다. 주장까지 담당하게 된 하퍼는 젊은 클리퍼스를 16년 만에 플레이오프 무대로 이끌며 마침내 ‘주역’으로 우뚝섰다. 1992-93시즌에는 클리퍼스 구단 기록인 단일 시즌 스틸 기록(177개)도 갈아치우며 승승장구 했다.

하지만 하퍼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클리퍼스에서 보낸 마지막 해에 팀이 와해된 것이다. 클리퍼스의 미래였던 매닝과 ‘덩크 아티스트‘ 도미니크 윌킨스의 트레이드가 불운의 시작이었다.

취지는 나쁘지 않았다. 구단 입장에서는 윌킨스가 전성기에 비해 운동신경이 다소 떨어졌지만 흥행 상승과 함께 당장의 전력에 큰 보탬이 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정작 윌킨스의 생각은 달랐다. 10여 년 동안 애틀랜타 호크스의 아이콘이자 NBA를 대표하는 슈퍼스타였기 때문에 클리퍼스 행은 그에게 있어 좌천과도 다름없었다.

프랜차이즈 스타와 함께 팀의 재건을 다짐했던 하퍼의 꿈은 그렇게 허물어졌다. 미래를 약속했던 젊은 유망주들은 하나 둘 팀을 떠났고, 주위에는 불만으로 가득 찬 베테랑 선수들과 은퇴를 앞둔 노장들, 이적을 기다리는 일회용 선수들로 득실댔다.

하퍼는 또 한 번의 멋진 시즌을 보냈지만 팀은 27승 55패를 거두며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994-95시즌을 앞둔 하퍼 인생에 일대 개혁의 바람이 일었다. 무릎수술과 시카고와의 계약. 두 번째 터닝포인트였다.


희생과 바꾼 6개의 우승반지 
 
시카고가 하퍼에게 원하는 것은 클리퍼스와 같았다. 조던의 돌연은퇴로 득점을 올려주는 공격형 슈팅가드를 물색하던 차에 눈에 띈 것이 하퍼였다. FA신분이었던 하퍼의 영입은 즉각 이루어졌다.

하지만 하퍼는 무릎수술로 인해 그가 가지고 있던 많은 재능을 잃은 상태였다. 스피드와 점프 등 그가 자랑했던 운동능력은 대부분 상실되었고 베테랑 선수들에게도 난해한 ‘트라이앵글 오펜스’의 적응까지 온갖 악재들이 그를 괴롭혔다. 시련의 연속이었다.

개인기록은 자연스레 전 카테고리에서 데뷔 이래 최저를 기록했다. 시카고의 필 잭슨 감독은 하퍼를 53경기에서 선발로 내세웠지만 출장시간은 20분 이하만 허락하였다. 경기 당 20점이 가능했던 올스타 급 가드가 평균 6.9점의 벤치선수로 전락하기까지 1년도 걸리지 않았다. 결국 두 자리 수 득점도 힘겨워 보이는 하퍼의 ‘조던화’는 실패로 끝났다. 그리고 야구로 외도한 조던이 극적으로 돌아왔다. 

조던이 되야 했던 하퍼는 조던의 쉬는 시간을 대신하는 벤치워머의 역할을 감내해야 했다. 조던의 컴백이 마냥 기쁠 수가 없었던 이는 아마도 하퍼가 유일했을 것이다.

역사적인 1995-96시즌을 앞둔 시카고는 더 이상 하퍼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조던은 연일 단내 나는 개인훈련으로 예전의 기량을 되찾고 있었으며 제 2옵션인 스카티 피펜 역시 언제든 20점이 가능한 올스타 포워드였다. 그 뒤를 잇는 토니 쿠코치는 두 시즌 동안 검증을 마치며 벤치에서 가장 신뢰받는 식스맨으로 시즌을 기다리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하퍼의 역할에 변화가 불가피 했다. 잭슨은 결국 하퍼를 주전 포인트가드로 임명하고 조던과 피펜의 백코트에 보다 사이즈와 힘을 높였다. 198cm의 신장을 지녔던 하퍼는 예나 지금이나 포인트가드로서는 파격적인 높이의 이점을 십분 살렸다. 슈팅가드부터 스몰포워드까지 수비할 수 있는 하퍼의 폭넓은 매치범위는 조던과 피펜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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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하퍼는 비록 존 팩슨이나 B.J. 암스트롱 같은 선수들에 비해 슈팅능력이 부족했지만 NBA 역사상 가장 경쟁력 있는 백코트 수비의 한 축으로 그의 존재가치를 재조명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혹자들은 조던과 피펜 그리고 하퍼가 수비진영에 나란히 서 있으면 코트가 꽉 차 보일정도라고 하였다. 이들의 긴 팔에서 나오는 인터셉트와 발군의 수비능력은 24초 공격시간이 갱신되는 시점부터 상대팀을 압박했다.

‘전문수비수’로서 새로운 농구인생을 시작하게 된 하퍼는 점차 트라이앵글 시스템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볼을 잡고 공격을 시작하고 주도했던 과거는 뒤로하고 공 없이 어떻게 움직여야하는지가 그의 최우선 과제였다. 하퍼는 기꺼이 동료들이 득점을 올리기 위한 발판이 되어 주었다. 이따금씩 재치 있는 컷인 플레이로 골밑 득점을 올리기도 하였고 위크사이드에서 더블팀에 빠져든 조던과 피펜에게 공을 받아 3점 슛도 넣어 주었다. 자주는 아니었지만 그에게 할당된 공격범위 내에서는 최선을 다 해주었다.

3연속 우승. 그를 빛내 주었던 재능을 반납한 댓가로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선물을 받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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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퍼는 이후 조던의 은퇴와 피펜의 이적, 잭슨 감독의 재계약 불발로 붕괴된 시카고를 떠나 다시 한 번 LA를 찾는다. 리그 대부분의 선수가 뛰길 원하며 새로운 왕조를 준비하고 있는 팀이라는 점에서 전과 달랐다. 그의 4번 째 팀은 바로 명문구단 레이커스였다. 은사 잭슨 감독의 간곡한 설득이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레이커스는 시카고의 코칭스태프가 이동했기 때문에 유니폼 색만 제외하고는 낯설지가 않은 곳이었다.

하퍼는 정신적인 멘토역할을 자처하며 젊은 레이커스에 노련함을 가져다 주었다. 과거 경험을 토대로 트라이앵글 오펜스의 이해를 도왔고 젊은 코비에게는 정신적인 멘토역할을 수행했다. 

마침내 레이커스는 90년대의 긴 터널을 지나 밀레니엄의 첫 번째 왕좌에 오르며 3연속 우승을 일궈냈다. 하퍼는 늘 그랬듯이 밀레니엄 왕조의 탄생에 숨은 조연으로 다시 한 번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였다.

강요된 희생은 아니었지만 누구나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운명은 아니었다. 필시 대개는 보이콧이나 이적을 요구하며 본연의 자아를 잃는 것을 두려워했을 것이다.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태업이나 젊은 나이에 은퇴하는 선수들을 종종 목격하기도 한다. 하퍼가 아직까지 추억되는 이유다.

금세기 최고의 농구팀으로 기억되는 90년대 시카고 불스. 그들과 함께 호흡하며 역사를 만들었던 인물을 만나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번 방한은 많은 올드팬들에게 남다른 의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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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트로이트 피스톤스와 올랜도 매직에서 감독을 지냈던 척 데일리 감독이 췌장암과 투병 끝에 결국 78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했다. 디트로이트 구단은 그가 9일(이하 한국시간) 플로리다 주피터에 소재한 자택에서 유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히 떠났다며 AP를 통해 전했다.

디트로이트의 구단 대변인은 금일 “개인적으로나 프로리그에서 그와 만났던 모든 사람들은 그의 영광을 기릴 것이다. 데일리 감독의 혼은 우리와 함께 영원히 살아 숨 쉴 것”이라며 애통함을 감추지 않았다.

데일리 감독은 지난 1989-90시즌과 1990-91시즌에 걸쳐 2년 연속 디트로이트를 우승으로 이끌었고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는 원조 드림팀과 함께 조국에 금메달을 안긴 명장 중에 명장이었다. NBA 우승과 금메달을 모두 손에 쥔 감독은 데일리 감독이 최초였다. 그는 지난 1996년 NBA 50주년 행사에서 최고 감독 10인에 선발되었고 2년 뒤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바 있다.

“NBA는 선수들의 리그다. 선수들이 당신을 코치로 인정하거나 아니거나 둘 중 하나다. 선수들이 감독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만 두는 수밖에 없다” 생전에 데일리 감독이 남긴 말이다. 결국 주역은 선수이며 감독 스스로가 자신의 입지를 다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교훈이다. 그는 강력한 카리스마로 선수들을 휘어잡는 스파르타 교육을 따랐고 이는 오히려 개개인의 선수들을 융화시키는데 큰 효과를 낳았다.
 
디트로이트 시절에는 이른 바 배드보이즈라 불리던 거친 선수들을 한 대 묶어 ‘팀’으로 거듭나게 만들었다. 악동의 대명사와도 같은 데니스 로드맨은 그를 스승 이상으로 따르며 순종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가 1993년 샌안토니오 스퍼스로 이적한 이유도 데일리 감독의 재계약이 불발이었으니 선수들의 신뢰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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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팀은 또 어떠한가. 데일리 감독은 지구 최고의 농구선수들만 엄선하여 발족한 드림팀도 하나의 팀으로 똘똘 뭉치게 만들었다. 마이클 조던과 찰스 바클리, 매직 존슨 등 개성 강한 스타선수들도 그를 감독으로 인정하고 따랐다.

과거 데일리 감독의 제자였던 디트로이트의 단장 조 듀마스는 “데일리 감독은 농구만큼이나마 사람들을 잘 이해한다”며 고인을 추억했다.

드림팀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래리 버드는 “그와 오랜 시간 NBA에서 지냈다. 팀은 언제나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는 정말 좋은 코치였다”며 안타까움을 전했다. 버드는 이어서 “드림팀에서 우리는 함께 잘 해냈다. 스타들이 우글거렸지만 주된 쟁점은 누가 가장 많은 득점을 올리냐가 아니라 오직 하나, 금메달을 따내는 것이었다”며 지난날을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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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드림팀이 처음부터 이타적인 마인드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리그 득점왕서부터 대학 최고의 선수까지 모두가 스타 플레이어다보니 아무래도 자만심이 피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분위기를 감지한 데일리 감독은 초장부터 군기를 잡겠다는 심산으로 당시 앤퍼니 하더웨이와 크리스 웨버, 그랜트 힐 등 대학 올스타 팀을 구성하여 친선경기를 추진하였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본선에서 맞붙게 될 유럽의 강호들과 비슷한 세트오펜스와 지역방어 전술을 대학팀에 주문한 데일리 감독의 예상이 적중했던 것이다. NBA와 다른 국제 전술패턴을 직접 경험시켜 주는데 그치지 않고 스타군단의 기강해이까지 조기에 단속하며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셈이다. 이는 드림팀에게 좋은 자극제가 되었고 금메달을 잡는데 중요한 동기부여가 되었다. 데일리 감독은 당시 올림픽 최종 결승전이 끝난 후 “나는 경기장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다”며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 그의 팀들만 놓고 보면 최고의 선수들만 지도하며 손쉽게 1등을 차지한 듯 보이지만 그는 최고의 전략가이자 전술가였다.

흔히 디트로이트를 최고의 수비 팀으로 보는 이가 많았지만 사실 디트로이트는 공격에도 능한 챔피언이었다. 정상급 포인트가드인 아이제이아 토마스를 중심으로 다양한 전술을 만들어냈다. 센터임에도 뛰어난 슈팅능력을 보유했던 빌 레임비어는 다양한 2대2 플레이로 활용했고 조 듀마스나 마크 어과이어 등의 윙맨들도 이러한 전술패턴에서 빛을 발했다.

데일리 감독이 본격적으로 지도자의 길을 택한 것은 1978년 필라델피아 76ers에서였다. 그는 빌리 커닝햄 감독 아래서 어시스턴트 코치직을 수행하며 기회를 기다렸고 클리블랜드에서 마침내 염원하던 헤드코치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시작은 좋지 않았다. 그는 1981-82시즌 9승 32패로 저조한 성적을 남기며 정규시즌을 채 마치기도 전에 해고되는 아픔을 겪었다. 이듬해 1983년 디트로이트와 계약한 데일리 감독은 이후 토마스와 듀마스, 레임비어, 로드맨 등 2년 연속 우승의 주역들을 맞이하며 팀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흔히 알려진 ‘배드보이즈'의 이미지는 이때 탄생하였다. 상대 선수들을 코트에 내치며 거친 파울도 마다하지 않는 디트로이트의 경기방식은 찬사와 비난이 함께 쏟아졌다. 좋게 보면 승리에 대한 열망이 충만한 프로의식이었지만 동업자 정신의 결여와 비열함이라는 부정적인 측면도 공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혈이 낭자한 전쟁터 한 켠에 우두커니 선 데일리의 생각은 확고했다. “나는 오히려 선수들에게 권장하고 도발시켰다. 누가 상관 하겠는가” 리그에서 가장 터프하고 위험했던 팀 수장의 말이다.

2번의 우승을 맛본 뒤 90년대 최고의 농구팀 시카고 불스가 도약하자 디트로이트는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책임은 당연히 데일리 감독의 몫이었다. 그는 결국 뉴저지 네츠에 새둥지를 틀었고 두 시즌동안 팀을 플레이오프에 올려놓았다. 로드맨은 훗날 자서전을 통해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구단프론트의 간사함을 실랄하게 비판하며 안타까움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이후 방송해설가로 모습을 드러낸 데일리 감독은 1997년 샤킬 오닐의 추천으로 올랜도 매직과 계약을 맺으며 감독으로 컴백하였다. 직장폐쇄로 반쪽시즌을 맞이한 1998-99시즌까지 2년 동안 74승을 거두며 나쁘지 않은 성적을 남겼지만 시즌이 종료하고 그의 지도자 인생은 막을 내렸다. 당시 68세였던 데일리 감독이 사임을 선택한 이유는 오랜 지도자 생활에 염증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그의 심신은 지쳐있었다.

하지만 데일리 감독의 농구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감출 수가 없었다. 그는 2000년 밴쿠버 그리즐리스의 고문을 담당하며 NBA와 연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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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방황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는 디트로이트의 선장이었다. 구단은 지난 1997년 2회의 우승과 함께 데일리 감독의 업적을 기리고자 2번 유니폼을 영구결번 시킨 바 있다. 당시 배드보이즈의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릭 마혼은 “당신 없인 우리도 없었을 것이다”며 스승의 공로를 치켜세웠다.

13번의 정규시즌에서 통산 638승 437패를 거둔 데일리 감독은 12번의 플레이오프 진출을 일궈내며 75승 51패를 남겼다.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그에게도 한 가지 간절했던 타이틀이 있다. 바로 올해의 감독상 트로피가 그 것이다.

하지만 프로스포츠에서 성공의 바로미터인 우승을 이끈 그는 영원한 승자요 명장으로 우리 기억에 남을 것이다. 

고인은 아내 테리와 딸 시드니, 그리고 손녀 세브리나와 코너를 유족으로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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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의 출애굽기 14장을 보면 이러한 잘 알려진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4:21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어민대 여호와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 지라 14:22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 14:23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들이 다 그 뒤를 쫓아 바다 가운데로 들어오는지라 14:24 새벽에 여호와께서 불 구름 기둥 가운데서 애굽 군대를 보시고 그 군대를 어지럽게 하시며 14:25 그 병거 바퀴를 벗겨서 달리기에 극난하게 하시니 애굽 사람들이 가로되 이스라엘 앞에서 우리가 도망하자 여호와가 그들을 위하여 싸워 애굽 사람들을 치는도다.

너무나도 잘 알려진 이스라엘의 해방에 관한 역사이며, 그들의 하나님이신 여호와의 종, 모세를 통해 이루어진 기적의 기록입니다. 1950년대에 찰튼 헤스턴이 모세 역을 맡았던 영화 '십계'를 통해서도 잘 알려진 에피소드지요. 

 


1983년 5월, 뉴욕 메디슨 스케어 가든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같은 '모세'에 의해서.

시계를 거꾸로 돌려 1982년 여름의 필라델피아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줄리어스 어빙이 이끌던 필라델피아 76ers는 1977년부터 1982년까지 컨퍼런스 타이틀을 밥먹듯 쟁취하며 파이널에만 세 번을 올라갔던 강 팀이었습니다. 그러나 파이널마다 이들이 넘지 못했던 벽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리바운드의 열세'였지요. 백보드 부수기만 좋아하던 괴물 덩커, 대럴 도킨스, 그리고 수비는 좋았으나 몸싸움에서 많이 밀렸던 키 큰 파워 포워드, 콜드월 존스. 이 두 명의 빅맨으로 빌 월튼, 모리스 루카스, 로버트 패리쉬, 케빈 맥헤일, 커림 압둘자바 등이 버티고 있던 리그의 강 팀들을 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1982년 파이널에서도 식서스가 압둘자바의 레이커스에 무릎을 꿇자, 식서스의 구단주, 해럴드 캣츠는 큰 용단을 내립니다. 자유계약 선수로 풀리는 휴스턴 로켓츠의 모제스 말론을 당시로서는 구기 종목 사상 최고의 충격적인 금액인 6년 13.2 밀을 제시하며 데려오기로 결단을 내린 것이죠. 휴스턴에서 이에 맞서 대응을 했으나, 악에 받쳐 말론에 올인하겠다는 식서스 구단주의 결심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식서스는 1983년 드래프트 1번 픽 권한 (이 픽이 랄프 샘슨이 될 것임은 식서스도 알고 있었습니다)과 콜드월 존스를 묶어서 모제스 말론과 트레이드 합니다.


모제스 말론... 좀 더 정확하게 발음하자면 '모우지스 멀론'인데, 이 모제스 (Moses)가 바로 구약성서 출애굽기의 그 '모세'와 같은 이름입니다. 히브리어로는 '모셰'라고 하는데, 그래서였는지 당시 한국 신문에서도 이 선수를 '모세 말론'이라고 표기를 했었습니다.

이미 리그 MVP를 두 번이나 수상했고, 매 시즌 리바운드왕이었으며, 특히나 압둘자바와의 대결에서도 우위를 가져갈 수 있는 28세의 센터. 거의 혼자의 힘으로 약체였던 휴스턴 로켓츠를 1981년 파이널까지 올려놓았던 80년대 당시의 MDE.

그가 줄리어스 어빙의 식서스에 합류를 한 것입니다.

예상대로 이 식서스는 타 팀들을 파죽지세로 몰아 붙이며 정규시즌을 65승이라는 성적으로 마쳤습니다. 사실 시즌 막판 어빙의 부상만 없었다면 70승을 거둘 수도 있었던 팀이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입니다. 전년도 시즌, 팀 리바운드가 리그 꼴찌권이었던 팀이 말론의 합류로 단 번에 리그 1위의 자리에도 올랐습니다.


플레이오프가 시작되기 직전, 모제스 말론은 TV 카메라 앞에서 식서스의 플레이오프를 다음과 같은 세 마디 말로써 전망했습니다.

"Fo, fo, fo".

다시 말해 "4승, 4승, 4승", 세 번의 스윕으로 우승하겠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었고, 일종의 예언(?)이었습니다.

모제스 말론은 프라이드와 자부심이 대단한 선수였습니다. 식서스에 합류하면서 백넘버도 24번에서 2번으로 바꾸었죠. 자신의 1년 연봉이 2백만 달러임을 져지넘버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받는 최고액 연봉에 걸맞는 활약을 하겠다는 자기 스스로에 대한 채찍질의 간접적인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당시에는 양 컨퍼런스에서 각각 6개의 팀들만이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었습니다. 그리고 상위 시드 1, 2위 팀은 부전승으로 1라운드를 통과했고, 나머지 3~6위의 팀들 중 두 팀이 올라와 1, 2위 팀들과 컨퍼런스 준결승전을 치뤘습니다.

리그 1위였던 식서스는, 뉴저지 넷츠를 이기고 올라온 뉴욕 닉스와 2라운드를 치루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 당시의 뉴욕 닉스는 결코 만만한 팀이 아니었습니다. 올스타 센터였던 빌 카트라이트, 80년대 초중반, 어빙, 버드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스몰 포워드, 버나드 킹, 그리고 찰스 오클리 스타일의 리바운드왕 출신 파워 포워드, '트럭' 로빈슨까지 버티고 있던 팀입니다.

그러나... 뚜껑을 열고 보니 일방적인 시리즈였습니다. 홈에서의 2연전을 아주 쉽게 챙긴 식서스는 3차전 원정경기마저 승리로 장식하며 시리즈 스윕을 눈 앞에 두게 된 것이죠. 스윕을 당하지 않으려는 닉스 선수들이 절치부심 4차전에서 죽기살기로 경기에 임했습니다.


4차전 종료 1분을 남긴 상황에서 양 팀은 동점이 되었습니다.

닉스의 공격. 골 밑의 빌 카트라이트에게 버나드 킹의 패스가 투입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카트라이트 뒤에 있던 말론이 이 엔트리 패스된 공을 쳐냈습니다. 식서스의 모리스 칙스가 가까스로 이 공을 살려내 다시 모제스 말론에게 공을 던져 주었습니다.

공을 다시 건네받은 말론은 하프라인 바이얼레이션에 걸리지 않기 위해 본인이 스스로 공을 몰고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센터가 공을 드리블하기 시작하자 이 공을 뺏으려고 닉스 선수들이 겹겹이 그의 앞을 막아서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 때였습니다,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 모인 닉스 팬들이 자기들의 눈을 의심한 것은.

자기 앞에 서있는 카트라이트를 방향전환 드리블로 가볍게 제친 말론은 포인트 가드인 트렌트 터커마저 크로스오버 드리블로 따돌리고, 몸을 날려 그의 드리블을 저지하려던 어니 그런펠드도 360도 스핀 무브로 뚫습니다.

뒤쫓아온 카트라이트의 스틸시도를 왼 손 드리블로 가볍게 처리한 뒤, 골밑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터프가이, '트럭' 로빈슨 위로 점프하며 더블 클러치 레이업을 올려 놓았습니다.

그의 돌파와 드리블 앞에서 추풍낙엽처럼 떨어져나가는 닉스 선수들.... 거대한 센터가 coast-to-coast 기술로 상대팀 선수들을 넉다운 시키는 진풍경이었습니다.

마치 모세가 홍해를 지팡이로 가르는 듯한 모습이었죠.

닉스 선수들과 팬들은 경악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식서스의 시리즈 스윕을 겸허한 자세로 받아 들여야만 했습니다.

이 닉스와의 시리즈에서의 모제스 말론의 스탯은 게임당 31점, 18리바운드였습니다.



1982년 여름, 식서스에 입단할 당시부터 '식서스의 구세주', '식서스를 해방시켜 약속의 땅으로 이끌 모세'로 필라델피아 시민들로부터 큰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모제스 말론. 그는 팬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고, 파이널에서 압둘자바와 매직 존슨의 레이커스까지 스윕해버리며 필라델피아 시민들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었습니다.

1983년 5월, 구약성서의 한 믿음의 영웅과 같은 이름을 갖고 있던 그가, 그 영웅이 보여줬던 홍해의 기적을 뉴욕의 심장인 메디슨스퀘어 가든에서 재연해 보인 것은 이 팬들과의 약속의 실현을 준비하는 장엄한 전주곡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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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시카고 불스의 백코트를 지휘했던 놈 반 리어의 사망소식이 알려진지 불과 2시간 후에 또 다른 비보가 울리며 시카고 시민들은 망연자실하였다. 전 시카고의 감독이자 지역 방송국 아나운서를 담당해온 조니 ‘레드’ 커는 오랫동안 전립선암과 투병해왔지만 76세를 일기로 그렇게 유명을 달리했다. 홈구장인 유나이티드센터에서 그의 기념식이 치러진지가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조니 ‘레드 커’는 시카고 불스의 아이콘이다” 구단주 제리 레인스도프의 말이다. 그는 이어서 “커의 위대함을 그리워 할 것이다. 그의 명복을 빌고, 유가족들에게 심심한 조의를 표한다”며 비통함을 감추지 않았다.

NBA 마니아들이나 시카고 불스의 골수팬이 아니라면 그가 이름이 다소 생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이 활약하던 지난 90년대 경기를 떠올려보자. 시카고의 홈경기가 있을 때마다 조던은 어김없이 경기 전, 송진가루를 손바닥에 묻혀 털곤 했다. 마치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르브론 제임스처럼 말이다. 제임스의 화려한 퍼포먼스에는 열광하는 관중들의 함성이 뒤따랐지만, 조던의 행동에 늘 곤욕을 치룬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古 레드 커다. 가루가 흩날릴 때마다 익살스런 표정으로 쿨럭 대던 그의 모습을 기억한다면 이미 그에 대한 절반의 추억은 떠올린 셈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커가 이룬 업적과 족적을 모두 설명할 수 없다. 흔히 알고 있는 WGN(시카고 불스 지역방송국) 아나운서 자리는 그의 기나긴 농구여정의 종착역에 불과 했기 때문이다.


농구인의 첫걸음, 선수생활의 시작   

1932년 7월 17일 세상에 태어난 레드 커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아버지 매튜와 스웨덴 출신의 어머니 플로렌스 사이에서 태어난 유럽혼혈아다. 하지만 아버지 매튜는 레드 커가 3살 때 폐렴으로 일찍이 세상을 등졌다.  

레드 커의 근래, 생전 모습을 그야말로 주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온화한 할아버지 그 자체였다. 백발이 성하며 자켓 사이로 삐져나온 후덕한 뱃살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영광의 시절이 있었다. 레드 커는 고등학교와 대학 농구에서 뛰어난 선수였고, NBA 우승과 올스타 선발경험도 지니고 있다.

뉴욕에 소재한 틸든 고교에 입학한 레드 커는 졸업반에 오르기 직전 무려 22cm 가까이 성장하는 기적을 경험하게 된다. 전 SBS 한창도 해설위원의 명언으로 익히 알려져 있는 스코티 피펜의 ‘경이로운 24cm'의 기적이 레드 커에게도 찾아온 셈이다. 이는 가장 좋아했던 축구 대신 농구를 택하게 만든 일대 사건이었다. 농구선수로서 최고의 날개를 달은 레드 커는 변화를 빠르게 받아들이며 곧바로 모교를 1950년 리그 우승팀으로 올려놓았다.

레드 커는 고교 졸업 직후 일리노이스 대학의 리쿠르팅으로 마침내 시카고와 연을 맺게 되었다. 일리노이스는 현재 마이클 조던의 장남인 제프리 조던이 소속되어 있는 학교로서 시카고 지역에서는 팬들의 지지도가 가장 높은 곳이다. 그가 NCAA(미 대학농구)에 남긴 업적은 굉장하다. 레드 커는 1952년 빅10 타이틀을 견인한데 이어 그 해 모든 대학농구선수들의 로망이자 꿈의 무대인 파이널포(역자주 : 토너먼트 4강전을 일컫는 말)를 밟는 기염을 토해냈다. 3년의 재학시절동안 그가 남긴 1299점은 모교 최다득점으로 남아있으며 컨퍼런스에서는 3번째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이러한 레드 커의 활약은 시카고 지역 언론인 트리뷴에서 9번째로 선정한 ‘빅10 실버 바스켓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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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인 1954년 NBA 드래프트에서 행운은 계속되었다. 전체 6번째로 시라큐스 내셔널스(現 필라델피아 76ers)에 지명된 레드 커는 데뷔와 함께 훗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전설적인 선수와 호흡을 함께 하게 됐다. 돌프 쉐이즈는 프로통산 12차례나 NBA올스타와 리바운드왕을 지낸 스타플레이어였다. 루키시즌에서 경기 당 10.5점, 6.6리바운드를 수확한 레드 커는 처음이자 마지막 우승에 기여하였다.

이후 11시즌을 시라큐스와 필라델피아에서 보낸 레드 커는 1965-66시즌을 앞두고 볼티모어 불리츠(現 워싱턴 위저드)에서 커리어를 마감한다. 통산 905경기에 출장하여 12,480점과 10,092 리바운드를 남겼으며, 경기 당 13.8점, 11.2리바운드를 기록했다. 한 번의 리그 우승과 3번의 올스타 선정도 뒤따랐다. 결코 화려하진 않았지만 무관의 제왕들도 울고 갈 우승반지도 손가락에 끼워 보며 남부럽지 않은 프로경력을 마감한 그였다.

또한 한 가지 간과하면 안 될 것이 레드 커는 매일 밤 같은 디비전의 윌트 체임벌린과 빌 러셀과 마주해야 했다는 사실이다. 러셀과 체임벌린이 누군가? 눈뜨는 아침이면 NBA 역사책의 기록을 갈아버리는 괴물들이 아니었던가. 두 거인들의 틈바구니에서 무언가를 해본다는 것은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질 일이었지만 레드 커는 쉽사리 굴복하지 않았고 당당히 더블-더블 활약을 이어왔다.

팀 동료였던 쉐이즈는 지난 2월 치러진 레드 커의 기념식에서 “50년대 최고의 센터는 빌 러셀, 2번째는 윌트 체임벌린이었고 레드 커가 넘버3였다”며 오랜 친구를 치켜세우기도 하였다. 전성기 시절의 샤킬 오닐과 현재의 드와이트 하워드와 함께 같은 디비전에서 10년 넘도록 더블-더블을 기록해온 백인센터가 있다면 어떤 평가가 내려질까? 비현실적인 상상으로 치부 될 수도 있는 가정이지만 레드 커의 시대적 상황은 현실이었다.

844경기 연속 출장 기록도 그의 성실함을 뒷받침한다. 이 숫자는 훗날 랜디 스미스와 철인 A.C 그린에 의해 깨지기 전까지 그만이 보유했던 넘사벽의 기록이었다. 마이크를 잡았던 아나운서의 모습만으로 고인을 추억하기에는 그가 남긴 NBA의 족적은 결코 작지 않았다.


세계적인 프로스포츠 팀, 시카고 불스를 창조하다

구단프론트에 몸담았던 시절에는 뛰어난 업무수행능력을 발휘하였으며, 존경받는 아나운서였다. 하지만 후세에 그가 기억될 이유가 있다면 레드 커는 오로지 시카고 불스밖에 모르는 인물이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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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불스가 탄생하기 전인 1966년, 연고지에는 이미 무수히 많은 프로스포츠 팀들이 존재하였다. NFL과 MLB, NHL등 대부분의 종목들이 한 자리씩 차고 있었다. 하지만 프로 농구팀을 창단하기 위한 여러 단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스의 탄생은 답보상태를 이어갔다. 이 가운데 레드 커가 구단프론트의 중책을 담당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신생팀 창단의 바람이 불자 타 구단들의 거센 반대로 난항을 겪었다. 하지만 레드 커는 현 미국 농구협회 이사회 회장을 지내고 있는 제리 콜란젤로를 위시하여 모든 실무진들과 힘을 뭉쳤고 결국 팀 창단에 성공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감독직을 자원한 레드 커는 젊은 황소군단을 진두지휘하였다. 33승 48패. NBA 역사상 존재했던 수많은 창단 팀들 가운데 최고기록이다. 뿐만 아니라 4대 메이저 스포츠로 불리는 NFL과 MLB, NHL에서도 전례가 없던 사건이다. 그 어떤 리그에서도 창단 첫 해 플레이오프에 오른 팀이 없었다. 레드 커의 올해의 감독상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시카고는 가드와 포워드를 겸하고 있는 제리 슬로안(現 유타 재즈 감독)이 팀 내 리바운드 리더를 차지할 정도로 단신 팀이었다. 이러한 핸디캡을 안고 있는 팀들의 해결책은 크게 다르지 않다. 팬들에게 “수비는 우리가 시합하는 방식”이라며 공약한 레드 커는 신장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속공과 강력한 압박수비를 주문했고 선수들은 이를 잘 소화해냈다. 레드 커는 당시 이를 두고 “마치 YMCA 농구를 보는 듯 했다”며 만족스러워 한 바 있다. 

창단 첫 해 치고는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지만 이듬 해 29승 58로 저조한 성적을 남기며 팀을 떠난 레드 커는 당시 NBA의 인기를 능가했던 ABA로 눈을 돌리게 된다. 화려한 ABA에 매료된 그는 시카고의 어시스턴트 코치이자 오랜 친구인 알 비앙키와 함께 버지니아 스콰이어의 단장으로 취임하였다. 이후 레드 커는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닥터 J' 줄리어스 어빙과 첫 번째 계약을 맺는 행운을 누렸으며 핑거롤의 대명사인 '아이스 맨’ 조지 거빈을 EBA라는 마이너리그에서 건졌다. 특히 거빈은 폭력사태로 NCAA에서 선수자격을 박탈당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진흙 속에서 진주를 건진 것과 진배없었다. 운수 한 번 기가 막히게 좋은 인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ABA와 NBA가 리그합병이 되면서 설 자리를 잃어버린 것이다. 시카고로 돌아가야 할 것을 직감한 레드 커는 곧바로 일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레드 커는 당시 팻 윌리엄스 단장이의 공백을 채우기 보다는 감독직을 더 원했다. 하지만 딕 모타 감독이 버티고 있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의 손에 마이크가 들릴 시간이 온 것이다.


헤드셋과 마이크로 연 농구인생 3막, 그리고 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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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나운서 경력 중 가장 자부할만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마이클 조던의 신성한 의식일 것이다. 조던은 경기 전 송진가루를 레드 커의 면전에 털곤 했는데 이것은 그가 신인 시절 처음 가졌던 연습경기부터 시작되었다. 조던은 훗날 “이 의식이 어떻게 시작됐는지는 잘 모르겠다. 처음 그를 봤을 때 멋진 정장이 눈에 띄었고, 조금 더럽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었던 것이 계기였던 것 같다”며 웃음 지었다.

레드 커가 방송인으로서 첫 발을 내딛은 것은 미국 스포츠 전문방송인 짐 더럼의 제안에 의해서였다. 이후 레드 커는 2007-08시즌까지 90년대 6회 우승과 함께 시카고와 울고 웃었다. 가까이서 까까머리의 젊은 청년이 시작했던 공중곡예를 모두 목격한 몇 안되는 인물인 셈이다.

이번 2008-09시즌에는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시카고의 전반전 해설을 담당할 정도의 열의를 보였다. 암도 레드 커의 열정을 꺾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지난 2003년부터 2년에 걸쳐 모조 왼쪽 엉덩이에 의지하며 발가락 절단수술과 심장수술을 경험하였다. 모진 풍파를 견디면서 끝까지 시카고의 농구를 시청자들에게 전파하였다.

하지만 그도 결국 인간이었다. 육신을 잠식하는 암세포는 그를 휠체어에 앉혔고 이는 그가 사랑했던 시카고와 농구, 그리고 세상과 이별을 고할 시간이 가까워졌음을 암시하였다.

“제 손녀딸 아이 하나는 저를 무척이나 따릅니다. 농구랑은 상관없이요. 왠지 아십니까? 저는 노래도 부를 줄 알고 문워크도 할 줄 알거든요” 트레이드 마크인 윙크를 날리면서 레드 커가 생전에 남긴 말이다. 열혈 농구인이었지만 집에서는 인자한 할아버지의 모습도 보여주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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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니 ‘레드’ 커. 붉게 타오르는 그의 머리카락은 그의 별명으로 쓰였고 미들네임이 되었다. 마치 어빈 매직 존슨처럼 말이다. 정열의 붉은 색으로 대변되는 시카고 불스에는 그렇게 23번의 농구신에 가려진 진짜 ‘미스터 불스‘가 존재했었다.

그의 열정은 영원히 시카고와 불스팀에 살아 숨 쉴 것이며 왕조의 부활에도 함께 하리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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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간판스타 르브론 제임스가 5일(이하 한국시간) 발표된 2008-09 NBA MVP 시상식에서 압도적인 차이로 MVP를 거머쥐었다. 이른 바 2010프로젝트로 명명된 미래의 FA시장 논쟁으로 마음고생도 겪었던 르브론에게 이번 MVP는 그 어느 상보다 값진 선물이었다.

르브론은 미국과 캐나다 기자단으로 구성된 총 121명의 배심원 중 109명에게 1위 표를 얻으며 올 시즌 그의 위력을 실감케 하였다. 1위 표에서 단 2명에게 지지를 얻은 지난 시즌 수상자 코비 브라이언트는 마이애미 히트의 드웨인 웨이드와 함께 근소한 차이로 2, 3위에 올랐다.

고졸 출신으로 지난 2003년 NBA행을 선언했던 르브론은 그의 희망대로 세인트빈센트-세인트매리 고교에서 MVP 공식발표식을 가졌다. “24살에 MVP에 뽑혔다. 이렇게 빨리 받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며 운을 뗀 르브론은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이 수상이 즐겁지 않다면 그 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열심히 플레이 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꿈이 현실이 됐다”며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생애 처음 정규시즌 MVP를 획득한 르브론은 데뷔 이래 꾸준히 후보에 올랐음에도 번번이 고배를 마셔야했다. 뛰어난 개인성적과 상반되는 팀 성적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올 시즌 가세한 모 윌리엄스와 기존의 팀 동료들이 제임스의 부담을 덜어주며 클리블랜드의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제임스는 40분 이상 강행군을 펼칠 필요가 없었고 이는 능률적인 경기운영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는 자연스레 팀 성적과 연결됐고 르브론을 마침내 ‘킹’의 자리에 앉혔다.

시즌 내내 끊이지 않았던 MVP 논란은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정규시즌 1위 확정과 함께 어느 정도 윤곽이 뚜렷해 진 것이 사실이다. 이번 시즌 뜨거운 감자였던 MVP 3파전의 주인공인 제임스와 코비, 그리고 웨이드는 그 누가 주인공이 되더라도 이견이 없을 만큼 훌륭한 시즌을 보냈다. 하지만 MVP 선정에 있어서 개인 성적보다는 팀 성적에 보다 더 가치를 부여해왔던 그간의 관례는 제임스와 코비의 대결로 압축시켰다.

케빈 가넷의 부상공백과 함께 주춤했던 보스턴 셀틱스를 제치고 마침내 동부 컨퍼런스 1위에 오른 클리블랜드(66승 16패)는 서부컨퍼런스 챔피언인 LA 레이커스(65승 17패)마저 근소하게 따돌리며 르브론에게 최고의 날개를 달아주기에 이르렀다.

올 시즌 르브론이 기록한 28.4점과 7.6리바운드, 그리고 7.2어시스트는 평이함 마저 느껴질 정도로 해매다 보여준 성적표이다. 하지만 숫자에서 드러나지 않는 많은 부분에서 르브론은 다시 한 번 성장해 있었다.

르브론은 데뷔 이래 지적받아온 수비와 외각 슛에서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다. 고무줄 같은 탄력을 무기로 경기 당 1.2블락을 뽑아냈고 이는 생애 최다 기록이다. 우람한 체격으로는 믿기지 않는 스피드를 발산하며 리그 스틸 수위에 이름을 올렸다. 대인방어 능력도 일취월장한 르브론은 뛰어난 공격수와 플레이메이커에 정상급 수비수의 대열에도 합류했다. 이번 2008-09시즌 수비왕 투표에서 르브론이 2위에 오른 것은 르브론의 괄목할만한 수비력의 성장을 반영한 결과였다.

자신의 단점을 장점으로 승화 시킬 줄 아는 선수는 많지 않다. 공수에서 완벽한 선수로 거듭난 르브론의 미래가 더욱 더 기대되는 이유다. MVP는 그가 말한 대로 코트 위에서 열심히 뛴 것에 대한 산물이며 이제는 더 높은 목표와 과제가 그의 앞에 주어졌다.

르브론은 금일 기자회견에서 “내 미션은 아직 완료되지 않았다. 이번 시즌 여전히 이루어여 할 것이 남았다. 6월에 또 다른 축하파티를 갖고 싶다”며 남은 플레이오프 일정에 대한 의사를 피력했다.

신인왕과 득점왕, 올림픽 금메달 그리고 MVP까지 얻은 르브론에게 남은 것은 우승뿐이다. 과연 르브론의 비상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귀추가 주목된다.

2008-09 NBA MVP 투표결과 (1위 득표/2위 득표/3위 득표/4위 득표)
르브론 제임스(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_ 1,172점 (109/11/1/0/0)
코비 브라이언트(LA 레이커스)_ 698점 (2/56/52/8/2)
드웨인 웨이드(마이애미 히트)_ 680점 (7/50/41/17/4)
드와이트 하워드(올랜도 매직)_ 328점 (1/3/17/63/23)
크리스 폴(뉴올리언즈 호네츠)_ 192점 (2/1/9/23/51)
첸시 빌럽스(덴버 너게츠)_ 33점 (0/0/0/6/15)
폴 피어스(보스턴 셀틱스)_ 21점 (0/0/1/2/10)
토니 파커(샌안토니오 스퍼스)_ 9점 (0/0/0/1/6)
브랜든 로이(포틀랜드 블레이저스)_ 7점 (0/0/0/1/5)
덕 노비츠키(댈러스 매버릭스)_ 3점 (0/0/0/0/3)
팀 던컨(샌안토니오 스퍼스)_ 2점 (0/0/0/0/2)
야오 밍(휴스턴 로케츠)_ 1점 (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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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신인왕 데릭 로즈와 멤피스 그리즐리스의 특급가드 O.J. 메이요가 올해 최고의 루키팀에 나란히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이들은 NBA 30개 구단의 모든 감독들이 참가한 이번 투표에서 유일하게 만장일치를 받아 미래를 이끌어갈 차세대 스타임을 다시 한 번 입증하였다.

신인왕 로즈는 일찌감치 ‘선택받은 자‘였다. 이번 시즌 경기 당 16.8점(신인 2위)와 6.3어시스트(신인 1위)를 기록한 로즈는 시카고를 다시 한 번 플레이오프로 이끌며 1번 픽의 몫을 톡톡히 해냈다. 이번 플레이오프에서는 디펜딩 챔피언 보스턴 셀틱스를 상대로 신인답지 않은 대담함을 과시하기도 하였다. 특히 1차전에서는 압둘자바가 보유하고 있던 신인 데뷔전 기록을 갈아치우는 등 명승부전을 연출하는데 일조하며 팀과 개인의 미래를 밝혔다.

메이요는 빼어난 슈팅기술을 과시하며 신인 전체 1위에 해당하는 경기 당 18.5점으로 존재감을 알렸다. 메이요는 이번 시즌 총 1516점을 기록하며 밴쿠버와 멤피스 구단의 신인기록을 다시 썼다.

이 밖에 마이애미 히트의 마이클 비즐리와 오클라호마시티 썬더의 러셀 웨스트브룩, 그리고 뉴저지 네츠의 브룩 로페즈가 남은 퍼스트팀의 자리를 차지했다.

웨스트브룩은 시간이 흐를수록 일취월장하는 모습을 보이며 스타동료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이번 시즌 신인 중에서 유일하게 트리플더블을 기록한 웨스트브룩은 이번 시즌 경기 당 15.3점과 5.3어시스트를 뽑아내며 새 연고지 오클라호마시티 팬들을 흡족케 하였다.

시즌 전 큰 기대를 모았던 비즐리(13.9점, 5.4리바운드)와 로페즈(13.0점, 8.1리바운드, 1.8블락)도 이름값을 해냈다. 특히 로페즈는 대대적인 구단개편에 들어간 뉴저지의 골밑을 담당하며 블락부문에서 구단 신인기록을 세우는 기염을 토해냈다.


투표결과 * (퍼스트팀 득표점수 2점 / 세컨드팀 득표점수 1점)

2008-09 NBA 올루키 퍼스트팀
데릭로즈(시카고 불스)_ 58점(29/0)
O.J 메이요(멤피스 그리즐리스)_ 58점(29/0)
러셀 웨스트브룩(오클라호마시티 썬더)_ 53점(24/5)
브룩 로페즈(뉴저지 네츠)_ 49점(21/7)
마이클 비즐리(마이애미 히트)_ 44점(17/10)

2008-09 NBA 올루키 세컨드팀
에릭 고든(LA 클리퍼스)_ 39점(13/13)
케빈 러브(미네소타 팀버울브즈)_ 34점(7/20)
마리오 찰머스(마이애미 히트)_ 29점(5/19)
마크 가솔(멤피스 그리즐리스)_ 25점(2/21)
D.J. 어거스틴(샬럿 밥캐츠)_ 17점(0/17)
루디 페르난데스(포틀랜드 블레이저스)_ 17점(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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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펜딩 챔피언 보스턴 셀틱스가 극적인 드라마의 주인공이 됐다. 보스턴은 3일(이하 한국시간) TD뱅크노스가든에서 열린 최종 7차전에서 시카고 불스를 109-99로 따돌리며 8강 티켓을 끊었다. 양 팀은 이번 시리즈에서 무려 4경기 동안 7차례의 연장접전을 펼치는 명승부로 코트를 달구었다.

간판스타 케빈 가넷 없이 플레이오프를 맞이하게 된 보스턴은 폴 피어스와 레이 알렌이 건재함을 과시하며 우려의 목소리를 잠재웠다.

신예들의 성장이 특히 돋보였다. 팔방미인 레이전 론도는 비신사적인 행동으로 빈축을 사긴 했지만, 득점과 리바운드, 어시스트, 수비 등 전 부문에서 팀을 이끌다시피 하였다. 가넷의 대체전력으로 내세운 글렌 데이비스는 득점과 리바운드에서 120% 기대를 충족시키며 또 다른 신데렐라 탄생을 예고했다.

금일 경기에서는 벤치멤버들의 활약도 빛났다. 시리즈 동안 이렇다할만한 활약이 없던 브라이언 스칼라브리니(8점, 3점 슛 2/2)와 에디 하우스(16점, 3점 슛 4/4)가 전, 후반을 각각 책임졌다. 이들은 고비 때마다 차디찬3점 찬물을 끼얹으며 시카고의 추격의지를 꺾었다.

시카고는 해결사 벤 고든(33점)의 초반 야투 호조에 힘입어 27-23, 1쿼터 리드로 기선제압에 성공했다. 하지만 반복되는 시카고의 실책을 착실하게 득점으로 연결시킨 보스턴이 2쿼터를 장악하였다.

보스턴은 후반전 들어 론도(7점, 11어시스트)와 데이비스(15점)의 2대2 플레이로 손쉽게 득점을 뽑아내며 추격을 허용치 않았다. 반면 시카고는 고든과 샐몬(12점)의 쌍포가 침묵하며 신인 로즈(18점)의 1대1에 의지한 채 제자리걸음을 이어갔다.

운명의 4쿼터를 시카고는 무려 4명의 가드를 코트 위에 세우는 강수를 두었다. 조아 킴 노아(7점, 15리바운드)와 브래드 밀러(9점, 7리바운드)를 제외한 나머지 자리는 로즈와 하인릭, 그리고 고든과 샐몬이 포진하였다. 하지만 비니 델 니그로 감독의 모험은 큰 효과가 없었다. 가드는 넘쳐났지만 보스턴의 한 발 앞선 백코트로 기동력이 발휘되지 못했고, 돌파 후 킥아웃으로 만들어내는 오픈 찬스는 번번이 놓쳤다.

좀처럼 공격의 활로를 뚫지 못한 시카고는 노아와 밀러의 파울트러블 악재까지 겹치며 패색이 짙어져 갔다. 이를 기회삼아 켄드릭 퍼킨스로 골밑을 집중 공략한 보스턴의 승리로 기우는 듯 했다. 하지만 시카고에는 주장 커크 하인릭(16점, 4스틸)이 있었다.

하인릭은 공수가 붕괴된 상황 속에서도 시카고를 진두지휘하며 마지막까지 추격의 끈을 놓지 않았고, 경기 종료 42여초를 남기고 5점차까지 좁히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시카고의 투혼은 여기까지였다.

보스턴은 알렌(23점, 7리바운드)이 마지막 2분 동안 3점 플레이를 포함, 자유투 5개를 모두 쓸어 담으며 대혈투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로서 보스턴은 이틀간의 휴식 후 곧바로 올랜도 매직과 격돌하는 살인 일정을 맞이하게 됐다. ‘올해의 수비왕‘ 드와이트 하워드가 지난 시즌 수비왕 케빈 가넷 없는 보스턴을 어떻게 봉쇄할지도 귀추가 주목된다. 동부컨퍼런스 준결승 1차전은 5일 TD뱅크노스가든에서 치러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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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COLUMNS/JEFFREY23 2009. 4. 30. 10:40

NBA 역사 속의 오늘

BY jeffrey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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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il 30, 1956
보스턴 셀틱스가 에드 맥컬리와 클리프 하간을 세인트 루이스 호크스로 트레이드 하며 드래프트 1번 픽을 얻었다. 보스턴은 이 픽으로 빌 러셀을 지명하였다.

April 30, 1971
떠오르는 신성 카림 압둘자바와 베테랑 오스카 로벗슨 콤비가 볼티모어 불리츠와의 파이널 4차전(118-106) 승리를 견인하며 스윕을 거두었다. 밀워키 벅스는 구단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 우승이었다.

April 30, 1975

래리 오브라이언이 J.월터 케네디에 이어 3번째로 NBA 커미셔너에 부임하였다.

April 30, 1988
서부컨퍼런스 1라운드 2차전에서 83점을 합작한 슬리피 플로이드와 하킴 올라주원(각각 42점, 41점)의 휴스턴 로케츠가 댈러스에 119-108, 승리를 거두었다. 이들은 NBA 플레이오프 역사상 두 번째로 2명이 40점 이상을 뽑아낸 주인공이 되었다.

April 30, 2002
시애틀 슈퍼소닉스의 게리 페이튼이 역사상 2번째로 올 NBA 퍼스트 수비팀에 9번 당선된 선수로 이름을 올렸다. 이 기록은 앞서 마이클 조던이 시카고 불스 시절 세운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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